목요일 저녁에 깻잎, 양배추, 들깨가루를 듬뿍 넣은 순대볶음을 해서 맛있게 먹고 난 후였다. 남편은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된 연휴에 많이 먹었더니 몸이 좀 무겁다'면서 단식을 선언했다
금요일 아침부터 시작했다. 출근하면서 '난 아무것도 안 먹을 거니까 주말동안 당신은 알아서 잘 챙겨먹어'라고 당부했다.
우리 집 주말 요리 담당은 남편이기 때문에 남편의 단식은 곧 주방 파업인 셈이다.
건강검진을 위한 금식도 아니고 스스로 결정한 단식이다. 기본적으로 미네랄워터만 마시며 가벼운 활동을 한다.진짜 단식원처럼아침에는 죽염을 탄 물도 마시는 것 같았다.
주말 아침에는 사우나를 두 시간씩 다녀오고 그 외의 시간은 미네랄워터 병을 들고 앉아 티브이를 보거나 자전거를타고 동네를 돌고 왔다.
체중은 마지막날 오후에 측정하고 목표를 달성하면 일요일 저녁부터 해제, 달성이 안 되면 연장이라고 했다.
토요일엔 큰딸이 집에 들렀고, 일요일엔 작은딸이 왔다 갔는데 나는 나가서 애들과 점심을 사 먹고 들어왔다.
근로소득세를 내는 큰딸은 나에게 돌판두루치기를 사 줬고 용돈 받는 대학생인 작은딸에겐 내가 짜장짬뽕미니탕수육을 사 주었다.
딸들에게는 아빠가 특별 요리를 하지 않은 주말이 색달랐을 것이다.
-혹시 월요일에 수술 같은 거 하시려고 단식하시는 건 아니죠?
자기 집으로 가려고 신발을 신으며, 아빠를 닮아 생각이 많은 큰딸이 물었고
-아이고, 아빠 얼굴이 반쪽이 됐네.
역린을 건드리는 말을 잘하는 만큼, 상대가 들어서 기분 좋은 말도 잘하는 작은딸이 말했다.
이렇게 물만 마시며 사흘을 버틴 단식은 처음이지만 남편은 간헐적 단식을 가끔 한다. 그 시기에는 나만 저녁을 먼저 먹으면 돼서 주부로서는 편하지만 괴로운 것을 왜 굳이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배가 금방 고파지고 뭘 먹으면 또 금방 배가 부르는 타입이다. 배가 고프면 불쌍한 사람이 된 것 같고 뭘 하고 싶은 의욕도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밥을 안 먹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여자 배우들도 노출씬을 찍기 전 이삼 일은 굶는다고 한다. 평소에도 날씬하다 못해 말라보이기까지 한 그녀들이 그런다는 걸 보면 빠르게 슬림해지는 데에 단식이 효과적이긴 한가 보다.
첫째날인 금요일은 퇴근 후 모습만 봤기 때문에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둘째날은 가져올 짐이 있는 큰딸을 데리러 옆 도시에 갔다 왔고 밥은 안 먹어도 쌩쌩해 보였다.
그런데 사흘째날은 아침부터 얼굴에 좀 초췌한 빛이 돌며 원체 없는 말수가 더 없어졌다.
작은딸과 밖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들어오니 남편이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우리를 보고 안방으로 슬쩍 들어가더니 아예 이불을 목까지 덮고 본격적으로 낮잠을 잤다.
두어 시간을 푹 자더니, '딸이 왔는데 아빠가 잠만 잤네' 하며 일어났다.
일요일 저녁에 남편은 체중을 재더니 금식이 끝났다며 미역을 불리고 사골국물 한 봉지를 뜯어 사골미역국을 끓여 먹었다.
사흘만에 음식을 먹은 남편이 동네 한바퀴 돌자더니 자연스럽게 마트에 들러 간단한 장을 보았다. 단식을 마친 날 저녁에 '소맥'을 드시겠다는 뜻이었다.
파우치 사골국이 그렇게 보양식이었구나.소주와 맥주를 담은 아저씨의 걸음이 어찌나 경쾌하던지 몰래 사진을 찍어버렸다.
엄격한 사흘을 마무리하는 엔딩은 이렇게 관대할 수가 없었다.
마트에 사흘 만에 오심
늘 분기탱천한 똘똘이스머프 같던 야당 정치인이 별안간 단식을 하더니 다 죽어가는 파파스머프처럼 보이던 게 오바가 아니었구나 싶다.
남편은 사흘 단식으로 몸무게가 4킬로 줄었다가 일상으로 돌아오고는 2킬로가 회복되었다.
단식을 또 할 거냐 물었더니 별로 힘도 들지 않고 단기간에 몸이 가벼워지니까 필요하면 또 하겠단다. 대신 주말에 하면 시간이 너무 안 가서, 근무하느라 일이 많은 평일에 하겠단다.
문득, 남편이 가장 말랐었던 군대 시절이 기억난다. 남편은 용산 국방부가 자대였는데 이등병 때 면회를 갔더니 그을린 피부에 홀쭉한 뺨으로 앉아있다가 짝대기 두 개 단 사병만 보여도 일어나서 경례를 하곤 했다.
주말에 엄마한테 학교 도서관 간다고 거짓말하고 순대나 피자를 사가면 정말 맛있게 잘 먹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