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명선 Jan 26. 2024

첫 데이트를 위한 빌드업

같이 먹는 한 끼의 마력

 인사를 하고 돌아서던 주인공이 용기를 내어 말한다.


- 저기, 주말에 같이 밥 먹을래요?


 사실은 여태 그 말을 기다렸던 상대는 가슴이 쿠당쿠당 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답을 꺼낸다.


- 음, 그럴...... 까요?


 남녀의 따뜻한 눈빛 교차해 보여주다가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미소, 카메라 마주 선 두 사람으로부터 부드럽게 멀어지면 메인 테마 흘러나오며 엔딩.

 뻔한 드라마의 이런 진부한 장면에도 저절로 '어머머' 가 난다.

 득한 젊은 날의 경험이긴 해도 저 순간의 야들야들한 기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러브 라인에 초록불이 지길 기대하는 약속 목적은 '밥 먹기'가 아니라 '함께 있기' 위해서라는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보통의 첫 데이트는 함께 밥을 먹으면서 시작한다. 


 과연 그들은 뭘 먹을까?

 첫 데이트에 어울리는 음식이면서 둘 다 좋아하는 음식이어야 한다. 메뉴를 정하고 분위기가 좋은 식당을 예약하고 뭘 입고 나갈지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잠을 못 자고 고민할 것이다.

 

 드라마 다음 화 에피소드에 음식과 식당 선정이 잘못다면 갈등 양상으로 끌어가겠고 음식과 무드가 좋다면 주인공 커플은 '그날부터 1일' 카운트일 가능성이 높다.    

어느 커플의 저녁




 남편과 나는 같은 반 친구에서 연인으로, 그리고 부부로 관계가 바뀐 케이스다. 그래서 친구에서 연인으로 전환된 시점이 모호하다.

 

 우리는 대입종합재수학원에서 같은 반 학생으로 만났다.

 시작부터 낭만적이지 않다. 차라리 '부모님이 이제 그만 선 좀 보라 성화를 하셔서 전망 좋은 5성 호텔 커피숍에서 처음 만났다'는 사연이 더 낭만적일 것이다.

 결코 재수학원에서 사귄 건 아니고(어머니, 소녀 이 부분은 결백합니다) 각자 대학에 진학한 뒤에 친해졌다. 같은 반에서 일 년 가까이 보면서 은 있었지만 우리 둘 다 연애와 공부를 병행할 능력자는 아니었다.

 재수생의 처지상 그저 성과 없이 끝날 수 있던 우리의 인연을 연결해 준 것은 '오리온 투유 초콜릿'이다.

 

 인생 두 번째 대학입시고사를 앞둔 늦가을의 어느 날, 학원에서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서 그 애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자기는 학원 종강일보다 먼저 본가로 가게 되었다고. 그래서 학원에는 이번 주까지만 나온다고 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는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고 나중에라도 연락을 하려면 집 전화번호나 주소를 알아야 할 텐데 우리는 그런 걸 알려준 사이가 아니었다.  

 학원에서가 아니라면 영영 볼 수 없는 사이. 뭐 랑은 이렇게 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만약 재수생이 아니라 대학생 신분으로 만났다면 친구가 되거나 사귈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애가 학원을 그만두는 날, 몇몇 남학생들이 강의실 뒤쪽에서 시끌벅적하게 배웅을 했다. 내가 작별 인사를  했 모르겠.

 그날   다들 조용히 자습을 하는 중이었다. 어떤 남자애가 오더니 '00 이가 너 주래' 하면서 가를 밀었다.

 투유 초콜릿 한 상자와 편지였다. 투유 초콜릿은 당시에 '사랑을 전할 땐 투유'라는 광고 시리즈로 인기가 많았다. 초콜릿 좋아해서 자주 사 먹었지만 한 상자를 통째로 만져본 적은 없어서 당황했다.

 남편이 학원 매점에서 한 상자를 사서 전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떠난 것이었다.  

 시험 잘 보고 각자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연락하자는 내용의 담백한 편지 아래에는 집 주소와 집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때의 초콜릿 한 상자와 편지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대견한 우리 딸들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건 마치 90년대 투유 초콜릿 광고 같지 않습니까?

기념으로 보관하고 있는 '1990년도 초콜릿' 포장지- 희망소비자가 200원



    

 남편과의 시작 부분이 기억에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이후로 세월이 대중없이 첩첩 쌓여서 어디겪은 일인지, 아니 진짜 있기나 했던 일인지조차 아리송할 때가 .

 극장이 많던 종각, 커플이 많던 신촌 같은 데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쏘다닌 무수한 시간들이 어렴풋하니 옛날에  영화 같다.


 한 때, '처음 만난 날'이 '처음 데이트한 날'을 기념한다는 친구가 무척 부러웠던 적이 있다. 결혼기념일 같은 공식적인 날도 물론 좋지만 지금에라도 첫 만남이나 첫 데이트 날을 어림잡아 정해 볼까 다. 그러기엔 단 둘이서 처음 밥을 먹은 날조차 버려서 무안하다.


 종각에서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으러 갔던 'pizza inn'(미국의 피자 체인으로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기억난다. 내 인생 처음으로 전문점 피자를 먹어 본 날이었는데 줄을 서서 메뉴판을 보다가 가격을 보고 놀랐다. 피자 한 판과 음료 세트가 당시 나의 한 달 지하철 정기권 상당이었다.

 여자친구에게 그렇게 비싼 피자를 사 주는 마음이 바로 사랑 것이다.


 맛있는 음식 함께 먹기는 사랑을 표현하고 사랑을 얻기에 딱 좋은 수단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성을 들여 음식을 만들어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전 01화 맛있군 마을식당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