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여태 그 말을 기다렸던 상대는 가슴이 쿠당쿠당 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답을 꺼낸다.
- 음, 그럴...... 까요?
남녀의 따뜻한 눈빛을 교차해 보여주다가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미소, 카메라가 마주 선 두 사람으로부터 부드럽게 멀어지면 메인 테마가 흘러나오며 엔딩.
뻔한 드라마의 이런 진부한 장면에도 저절로 '어머머'소리가 난다.
비록 아득한 젊은 날의 경험이긴 해도 저 순간의야들야들한 기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러브 라인에 초록불이켜지길 기대하는 약속의 목적은 '밥 먹기'가 아니라 '함께 있기' 위해서라는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보통의 첫 데이트는 함께 밥을 먹으면서 시작한다.
과연 그들은 뭘 먹을까?
첫 데이트에 어울리는 음식이면서 둘 다 좋아하는 음식이어야 한다. 메뉴를 정하고 분위기가 좋은 식당을 예약하고 뭘 입고 나갈지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잠을 못 자고 고민할 것이다.
드라마 다음 화 에피소드에 음식과 식당 선정이 잘못된다면 좀더 갈등 양상으로 끌어가겠고 음식과 무드가좋다면 주인공 커플은 '그날부터 1일' 카운트일 가능성이 높다.
어느 커플의 저녁
남편과 나는 같은 반 친구에서 연인으로, 그리고 부부로 관계가 바뀐 케이스다. 그래서 친구에서 연인으로 전환된 시점이 모호하다.
우리는 대입종합재수학원에서 같은 반 학생으로 만났다.
시작부터 낭만적이지 않다. 차라리 '부모님이 이제 그만 선 좀 보라고성화를 하셔서 전망 좋은 5성 호텔 커피숍에서 처음 만났다'는 사연이 더 낭만적일 것이다.
결코 재수학원에서 사귄 건 아니고(어머니, 소녀 이 부분은 결백합니다) 각자 대학에 진학한 뒤에 친해졌다. 같은 반에서 일 년 가까이 보면서 호감은 있었지만 우리 둘 다 연애와 공부를 병행할 능력자는 아니었다.
재수생의 처지상 그저 성과 없이 끝날 수 있던 우리의 인연을 연결해 준 것은 '오리온 투유 초콜릿'이다.
인생 두 번째 대학입시고사를 앞둔 늦가을의 어느 날, 학원에서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서 그 애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자기는 학원 종강일보다 먼저 본가로 가게 되었다고. 그래서 학원에는 이번 주까지만 나온다고 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는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고 나중에라도 연락을 하려면 집 전화번호나 주소를 알아야 할 텐데 우리는 그런 걸 알려준 사이가 아니었다.
학원에서가 아니라면 영영 볼 수 없는 사이. 뭐 얘랑은 이렇게 끝이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만약 재수생이 아니라 대학생 신분으로 만났다면 친구가 되거나 사귈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애가 학원을 그만두는 날, 몇몇 남학생들이 강의실 뒤쪽에서 시끌벅적하게 배웅을 했다. 내가 작별인사를 했는지모르겠다.
그날 저녁 다들 조용히 자습을 하는 중이었다. 어떤 남자애가 오더니 '00 이가 너 주래' 하면서 뭔가를 내밀었다.
투유 초콜릿 한 상자와 편지였다. 투유 초콜릿은 당시에 '사랑을 전할 땐 투유'라는 광고시리즈로 인기가 많았다. 초콜릿을 좋아해서 자주 사 먹었었지만 한 상자를 통째로 만져본 적은 없어서 당황했다.
남편이 학원 매점에서 한 상자를 사서 전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떠난 것이었다.
시험 잘 보고 각자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연락하자는 내용의담백한 편지아래에는 집 주소와 집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때의 초콜릿 한 상자와 편지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대견한 우리 딸들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건 마치 90년대 투유 초콜릿 광고 같지 않습니까?
기념으로 보관하고 있는 '1990년도 초콜릿' 포장지- 희망소비자가 200원
남편과의 시작 부분이 기억에 남아있어서 다행이다. 이후로세월이 대중없이 첩첩 쌓여서 언제 어디서 겪은 일인지,아니 진짜 있기나 했던 일인지조차 아리송할 때가 많다.
극장이 많던 종각, 커플이 많던 신촌 같은 데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쏘다닌 무수한 시간들이 어렴풋하니 옛날에 본 영화 같다.
한 때, '처음 만난 날'이나 '처음 데이트한 날'을 기념한다는 친구가 무척 부러웠던 적이 있다. 결혼기념일 같은 공식적인 날도 물론 좋지만 지금에라도 첫 만남이나 첫 데이트 날을 어림잡아 정해 볼까 했다. 그러기엔 단 둘이서 처음 밥을 먹은 날조차 잊어버려서 무안하다.
종각에서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으러 갔던 'pizza inn'(미국의 피자 체인으로 우리나라에도 있었다)의 기억이 난다. 내 인생 처음으로 전문점 피자를 먹어 본 날이었는데 줄을 서서 메뉴판을 보다가 가격을 보고 놀랐다. 피자 한 판과 음료 세트가 당시 나의 한 달 지하철 정기권 상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