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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Jan 19. 2024

맛있군 마을식당

다시는 갈 수 없는 그곳

 내가 '맛있군 마을식당'을 발견한 것은 5년 전의 봄밤이었다. 나는 아르바이트하는 딸을 마중하러 간 낯선 동네에서 우연히 걷는 중이었다.

 

 딸은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학과공부를 보충하기 위해 한 학기 휴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휴학 계획을 들으면서 대학교 전공과목을 가르쳐 주는 학원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딸은 휴학 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도 조금만 해 보겠다고 말했는데 그건 아마 얼마간은 아빠와 할아버지 때문이었을 거다.

 설연휴에 친가에 갔을 때 시아버님은 손녀에게 '휴학을 했으면 용돈도 벌어야지'라는 말을 했고 남편도 그래야 한다고 거들었다. 반면에 시어머니와 나는 '공부하려고 휴학하는데 아르바이트를 언제 하냐, 아빠가 용돈을 줘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아빠를 닮아 살짝 '대쪽 같은 꼬장함'을 가진 딸은 어른들의 그런 왈가왈부를 보면서, 그래 뭐 아르바이트를 하란 말씀이시죠? 했을 거라 추측한다.


 딸은 일주일에 두 번  시간 먼 동네 편의점에서 근무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미덥지 않은데 낯선 동네에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니 걱정스러웠다.

 그 편의점 주변은 3,4층 정도의 다세대 주택과 상가가 밀집했지만 번화한 지역은 아니고 큰길에서 들어앉은 신흥 주택가 느낌이었다. 밤 10시가 넘어 집에 오는 버스를 타려면 몇 분 이상 걸어 나온다.

 그래서 나는 끝나는 시간에 맞춰 딸을 데리러 가기로 했다.

 

 그날 밤도 편의점 맞은편에 주차를 하고 딸이 나오가 전까지 동네를 한번 돌아볼까 싶어 걷기 시작했다.

 길고 부드럽게 구부러지며 약간 경사가 있게 올라가는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걸었다. 밤 열 시를 향해 가는 시간이라 상점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드문드문 박힌 몇 개의 술집 테라스에만 불빛 속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거리를 구경하며 얼마간 가다 보니 넓은 면에 이르면서 세 갈래로 나뉘는 길목이 나왔다.


 걸음을 잠깐 멈추게 하는 세 갈래 길의 왼쪽 모퉁이에 맛있군 마을식당이 있었다.      


  



 그날의 영업을 마치고 깜깜하게 닫혀 있던 작은 식당이 왜 눈에 띄었는지 모르겠다. 보행자의 자연스러운 시선이 닿는 위치여서일까, ㄱ자의 통유리창에 블라인드를 내렸지만 마침 가로등이 조명이 돼줘서일까, 열어보고 싶게 생긴 나무 문이 있어서였을까.

 꼭 한번 저기서 밥을 먹어보고 싶었다.


 며칠 후에 남편과 함께 미리 가서 저녁을 먹고 딸을 마중하기로 했다.

 마을식당은 일본 가정식 요리를 하는 집이었다. 나는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일본 요리 이름을 잘 모른다. -동, -께, -코 이런 이름들은 여전히 헷갈린다.

 무슨 샐러드와 냉우동을 주문한 것으로 기억한다.

 남편이 '하이볼 먹을래?'라 물었다. 딱 좋은 선택이었다.

 가끔 집에서 토닉워터를 섞은 하이볼을 만들어 먹는데 '알쓰'라서 조금만 먹어도 취하는 주제에 그 이국적이고 예쁘고 달콤한 술이 마음에 든다. 하이볼 전용 글라스도 살까 싶어 검색한 적이 있다. 우리 부부 것만 사긴 그렇고 사려면 네 개를 사야지 하다가 그만두었다.


 내부는 크지 않았다. 4인용 테이블 네 개, 그리고 주방을 마주 보고 앉는 자리 몇 개 정도였다. 비싸 보이는 가구는 아니었지만 나뭇결을 풍기는 정다운 식탁과 의자가 있었다.

 음식을 만들고 서빙을 하는 두 명의 여자는 약간 어둑어둑하고 정적인 식당 분위기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혼자가 아닌 둘이서 딸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낯선 동네의 저녁 풍경을 구경하는 별 것 아닌 시간이 참 좋았다. 

           



 놀랍게도 나는 다시는 그 식당에 가지 못했다. 무슨 피천득과 아사코도 아니고, 아니 그들은 그래도 평생 세 번이나 만났다고 했다.

 그 후로도 서너 달 동안 딸을 데리러 그 동네에 갔었지만 나도 일을 하고 있었고 밤시간에 돌봐야 할 수험생 딸이 하나 더 있었다. 일을 마친 딸과 함께 가보려고도 했지만 그때는 식당의 영업시간이 끝난 뒤였다.

 그리고 그 무렵엔 몸보다 마음이 바빴던 것 같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안 돼 식당 출입조차 삼가던 팬데믹이 시작됐고 그 사이 우리는 맛있군 마을식당과 도보 15분 정도 되는 거리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한 후에 잠깐 생각했다. 이 쪽으로 쭉 걸어가면 그 동네가 나오는구나.

 

 2년 넘게 우리를 옥죄던 코로나가 사그라든 22년 초여름 저녁에 남편과 함께 식당을 찾아갔다. 그때 아쉽게도 오늘 휴무를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몇 주 뒤에 친구와 함께 가려고 보니 폐업하고 없었다.

   

 내가 딱 한번 가 본 그 식당을 간직하게 된 것은 그날 밤의 모든 것들이 딱 맞아서이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음식은 맛있었고 내 남편은 다정했고 산토리 위스키로 만든 하이볼의 씁쓸한 맛도 위로가 되었다. 똑같았던 하루지만 오늘도 잘 마무리한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딸이 곧 온다는 약속도 행복했다.


 추억은 맛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맛조차 기억나지 않더라도 때마침 내가 느낀 어떤 포인트 하나가 깊게 남아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든다.

 

 맛있군 마을식당에서 하이볼을 마시며 어둠이 내려앉는 거리를 바라보던 그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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