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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Feb 23. 2024

내 인생의 오픈런을 오픈한 케이크

케이크 오픈런의 날에

 2.3킬로그램 중량의 케이크에 딸기만 1킬로가 들어갔다는 그 유명한 딸기케이크를 아직 못 먹어봤다. 실물로 본 적도 없었다. 트렌드와 이슈에 진심인 사람들이 새벽부터 원정 케이크런을 불사한다거나 중고거래앱에서 프리미엄을 붙여 사고판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그게 좀 그렇다. 남들이 맞장구를 치며 공감하는 이슈에 끼지 못 한 채 '아...' 하면서 짐작만 하는 기분.

 그 케이크가 너무 무거워서 들고 다니기 힘들었다라거나, 잘라보니 딸기 반 시트 반이었다거나 이런 말들을 들으면 가 보지 못한 외국의 어느 거리를 상상하듯 비현실적이었다.    

 

 마침 남편 생일이 코앞에 있는 데다 작은딸이 짧은 방학으로 집에 있는 찬스에 나도 케이크런을 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평일에는 오후에 가도 딸기케이크를 살 수 있다는 후기를 믿고 이 겨울에 오픈런까지는 안 해도 되겠네 싶었다. 그런데 마음속으로, 만에 하나 못 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떼다 만 스티커처럼 남아 영 꺼림칙했다.

 결국 나는 아침 해도 안 뜬 시간에 작은딸과 둘이서 ktx를 탔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ktx역까지는 차로 20분이 걸린다. 우리는 아침 5시 반에 집을 나와서 기차역 환승주차장에 차를 맡겨 두고 6시 40분 고속열차를 탔다.

 원래 일하러 가는 게 아니라 놀러 갈 때는 꼭두새벽이든 한밤중이든 발딱 일어나게 된다. 눈은 피곤했지만 기차 안에서 졸지 않았다.      

 매장 오픈까지 15분 정도 남은 시각에 전설적인 딸기케이크의 성지에 도착했다. 문 앞에는 이미 여섯 명이 서 있었고 우리가 줄을 선 뒤쪽으로도 금방 사람들이 늘어섰다.

 8시 정각이 되자 창문 블라인드가 일제히 걷히고 눈부신 거점의 문이 열렸다.

  

 오늘의 출동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빵 구경을 했다. 케이크를 주로 파는 가게에서 나와 베이커리의 본점으로 갔다. 다행히 아직 바깥에까지 줄을 서지 않아서 바로 입장했다.  

 말투만 들어도 전국에서 모였음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이 경쟁하듯이 트레이에 빵을 담는 걸 보니 어쩐지 나도 많이 사야 할 것 같았다.

 

 -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 사 가면 후회하지 않을까? 일단 사 가서 친구들이랑 나눠 먹을까?

 

 그랬다가 정신을 차리고(사실 우리 주변에는 만만치 않은 네임드 빵집들이 많으니까)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빵과 먹어보고 싶은 빵으로만 신중하게 골랐다. 그래도 케이크 하나를 포함한 빵값10만 원을 가볍게 넘겼다.

 빵 쇼핑을 끝내고 나온 후에도 대부분의 가게들이 오픈 전인 이른 시간이라 근처에 곳들을 찾아 아침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쉬었다.     


 명품백 오픈런은 못 해 보고 그 대신 케이크 오픈런으로 인생의 오픈런을 오픈했구나.

오늘의 구입품

 




 사람들의 증언대로 케이크가 크고 무거워 들고 다니기가 번거로웠다. 사자마자 역사 내 물품 보관함에 소중히 앉혀 두었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도 케이크 운반에 정성을 기울인 덕에 500그램 두 팩 분량의 딸기가 하나도 흔들림 없이 잘 왔다.

 

 오늘 산 빵들을 늘어놓고 흡족히 바라보다가 생각해 보니 '오픈런'이라는 말이 나중에 생겼을 뿐 나도 수많은 오픈런을 하며 살았구나 깨달았다.

 학창 시절에는 학교 도서관 자리를 맡으려고 도서관 문을 열기 전에 줄을 서 봤고, 영화 예매 시스템이 없던 시절에 데이트할 때 조조 영화를 보려고 창구가 열리기 전부터 기다리는 일도 흔했다. 그리고 딸들을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 입학시키려고 아파트 앞 초등학교 문 앞에서 대기하던 기억도 난다.

 그러고 보니 코로나 초기에는 내 출생연도에 맞춰 마스크 한 장을 사려고 약국 앞에서 몇십 분 간 기나긴 줄을 선 적도 있지.

 그게 다 오픈런이 아니면 무엇인가. 꼭 인기 음식점, 명품 매장 앞에서 기다리는 것만 오픈런이 아니다. 깨닫고 보니 우리는 모두 오픈런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오픈런을 해야 한다. 단지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해 무엇을 얻으고가 아니라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는 오픈런을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부디 그때는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길지 않기를.

행복했던 오픈런의 추억



 먼길을 다녀와 획득한 딸기케이크는 보기만 해도 풍요롭다. 한두서너 개 슬쩍 집어먹어도 아무도 모르겠는데?

 빨리 내일서 우리 가족 모두 모여 아빠의 생일을 축하하는 케이크를 먹었으면 좋겠다.  

일단 열어보고 내일까지 냉장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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