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후보인 C는 20살 구축이라는 점을 빼고는 딱히 단점이 없었다. 누군가에겐 구축이라는 점이 가장 큰 단점일 수도 있겠지만 어플 후기를 뒤져도 그 오피스텔만의 반복적이고 고질적인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열 살 젊은 주변 오피스텔의 월세 가격으로 이곳에서는 월세와 관리비의 절반 이상을 낼 수 있다.
사회 초년생의 월급에서 매월 정해진 날에 반드시 나가야 하는 돈의 규모를 조금이라도 줄인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자취할 집을 알아본다는 말에 회사 선배들이 여기를 추천한 것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세 개의 매물을 보기로 했는데 전용면적 9평의 원룸형 그리고 주방과 침실이 분리된 12평형 타입이었다. 방이 구별되는 유형은 원룸보다 월세가 10만 원 더 비쌌다.
처음 보러 간 집은 원룸형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복도와 공용공간이 지금까지 둘러본 오피스텔들보다 넓고 환해서 일단 마음에 들었다.
보러 간 집에는 내 또래 중년 여성이 혼자 살고 있었다. 살림살이가 좀 많아 보였는데 생각보다 널찍했고 적당한 크기의 붙박이장도 있고 도배는 새로 해 준다고 했다. 그리 덥지 않은 날이었는데 에어컨을 엄청 세게 틀어 놓아서 잠깐 있는데도 썰렁할 정도였다.
그 세입자는 5년을 내리 살았다고 했다. 한 사람이 5년을 살았다면 집도 집주인도 큰 문제는 없겠다 싶었다. 창 밖으로는 그 도시의 젖줄(이라고 내 맘대로 생각함)인 하천이 유유히 흐르고 주변 공원길이 잘 정비돼 있었다.
어제까지 내가 계약하려 했던 리조트 단지 스타일의 A가 바로 길건너에 있으니 먹거나 놀 때 그쪽 인프라를 이용하면 된다. A의 장점을 누리되 A의 가장 큰 단점인 소음과 냄새 염려 없이 살 수 있는 집이었다.
우리 애는 집에서 나오면 되는 거라 이삿날짜가 언제든 상관없이 그저 빠를수록 좋았는데 그 세입자가 원하는 이삿날은 그날부터 열흘 후인 남편의 휴가 시작일이었다.
이것도 그린라이트 같았다. 더 둘러볼 것도 없이(남은 집들은 월세가 비쌌으니까) 바로 계약하겠다고 했다.
이번 여름휴가는 작은딸의 이사와 그 정리에 쓰면 되니 딱 좋다.
세상에 집이 많지만 내 집은 찾기 힘들다
잔금날이었다. 전 세입자가 나가면 오후에 도배를 한대서 우리는 다음날 아침 이사청소를 예약했다. 청소가 끝나면 아이의 옷과 살림을 직접 날라 놓는다. 옮겨야 할 큰 가구가 없어서 우리 집 SUV에 실어 한번 이동하면 해결되었다.
도배하기 직전에 남편과 함께 빈 집을 둘러보러 갔다. 지금까지 이 집을 본 건 나 혼자였고 남편도, 작은애도 아직 집안은 보지 못하고 문 앞까지만 가 본 상태였다. 어차피 들어갈 집인데 거기 사는 분 귀찮게 또 보여 달라고 하지 말고 이사 나가면 보자고 했었다.
남편에게 내가 얼마나 적당한 집을 찾았나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짐을 다 뺐다니 얼른 보고 오자고 재촉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빈 집에서 이상한 냄새가 온몸에 느껴졌다. 최근에 맡아본 적은 없는 냄새였지만 분명히 아는 냄새 같은데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는 아무튼 안 좋은 냄새였다.
여기 처음 들어와서 아무 말 없이 여기저기를 돌아보는 남편은 냄새를 맡은 건지 어떤 건지 무표정했다.
현관장을 열어본 남편이 무언가를 꺼내 보여줬다. 나는 냄새의 정체를 깨달았다. 현관장 선반에는 보란 듯이 빈 담뱃갑이 있었다.
그 집의 전 세입자는 실내흡연러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5년간 잘 살았다고, 걱정하실 거 없다고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럼 5년 내내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것인가.
게다가 온 국민이 집에 갇혀 지내다시피 한 지난 3년 동안 코로나 기간에는 얼마나 많은 담배연기를 뿜어댔던 것인가.
이 집을 계약하고는 잘했다고 생각한 나 스스로가 한심스러운 순간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자에게도 화가 났다. 정말 실내흡연을 한 집임을 몰랐을까.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체 소개를 하고 니가 나중에 알아도 뭐 어쩔 수 없잖아? 했던 것일까.
아니, 그나저나 이 기분 나쁜 냄새를 어떻게 빼야 하지, 뺄 수는 있는 건가?
일반적인 이사청소로 예약했던 청소업체 사장님은 흡연한 집은 청소 옵션을 추가해야 한다며 비용을 더 요구했다.
당장 들어와 살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돈을 더 줘도 냄새만 없앨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9평 원룸 청소에 30만 원을 들이고 장장 6시간 이상의 작업을 마치고 간 후에도 어쩐지 냄새가 그대로 같았다.
생각해 보면 몇 년간 실내흡연으로 찌든 냄새가 하루 청소한다고 빠질 리가 없다.
냄새의 수준이 어땠냐면, 그 집에서 한 나절을 보내고 우리 집에 오면 내 옷과 가방에서 담배 냄새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때 상황은 잘잘못을 따져서 청소를 다시 요구하거나, 전세입자나 중개업자에게 따진다거나 하는 문제보다 딸아이가 당장 살 집에서 나쁜 냄새를 최대한 빨리 없애는 것이 중요했다.
남편은 담배냄새 제거 작업에 올인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중에 큰애에게 말하니 전에 살던 사람에게 청소비를 왜 청구하지 않았냐고 했다. 우리는 집주인이 천장 빼고 벽만 바꿔 준 도배를 보고 우리가 천장을 새로 할까는 생각했지만 청소비를 물릴까 하는 생각은 못 했다.
정작 몰래 실내흡연을 한 사람은 쏙 빠지고 그 집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 중개한 사람, 아무것도 모르는 집주인 이렇게 남들만 다양한 피해를 본 셈이다.
중개사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계약서의 특약사항에 애완동물이나 흡연에 대한 명시를 남겼으면 전 세입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한다. 주의 깊게 읽지 않았던 부동산 계약서의 특약 부분이 그렇게 활용되는 것인 줄 이제 알았다.
작은애가 세입자 오픈채팅방에 가입하고 보니 자기 집에 살던 사람이 그 층 빌런이었다고 어이없어했다.
그 동 그 층의 언저리에서 지속적으로 나는 담배 냄새 때문에 힘들어한 이웃이 여럿이었고 지난달부터 냄새가 사라져서 너무 좋다는 내용이었단다.
빨리 애를 내보내서 출퇴근을 편하게 해 주고 싶은 목표에 눈이 멀어, 흡연 빌런이 살던 집을 몰라보고 계약한 잘못 때문에 나는 괴로웠다.
평소에는 담배 냄새를 그렇게 잘 맡는데 그날 그 집에 들어간 몇 분여 동안 왜 까맣게 몰랐을까.
혹시 내가 집을 보러 간 순간에 여름에도 추울 지경으로 에어컨을 세게 틀어놓았던 이유가 담배 냄새를 가리려던 수작이었나?
참 깜찍하네, 그 빌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