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 기간, 최고 기온, 전력 사용량 등 각 부문에서 기록적 무더위를 경신중인 이 여름에 두 딸이 각각 이사를 했다.
7월 하순과 8월 상순이었다.
한여름과 한겨울은 이사하기에는 영 아니다. 이사하기 좋은 날은 분명 따로 있다.손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날씨가 좋은 계절이다.
딸들이 한여름에 이사를 하니 남편은 이사의 요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름휴가를 반으로 쪼개 두 번의 이사에 사용했다.
큰애는 자취 3년 차지만 큰 가구가 없어서원룸이사 전문 1톤 트럭 기사님을 불렀다. 기사님은 짐 나르는 것을 도와줄 성인 남자가 있다는 전제 하에 15만 원이라고 했다.
남자친구나 남자사람친구 비보유자인 큰애의 이삿날에 트럭 기사님을 보조할 성인 남자는 아빠뿐이다.
트럭 기사님은 폭염 추가 옵션 없이 일을 맡았으니 받는 만큼만 일하시는 거고 남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딸의 일이니 진심을 다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도와주는' 수준이 아니어서 그날 우리가 이사하는 걸 흥미롭게 눈여겨보던 이웃 할머니들은 아마 남편을 '이삿짐 사장님 아래서 일 배우는 아저씨'이라 생각했을 거다.
집에서 기다리다가 둘이 어쩌고 있나 내려가 보니, 기사님은 동 앞에 트럭을 대고 끌차에 짐을 내려 실어만 주고 그 끌차를 끌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까지 나르는 건 남편이었다.
큰애도 아빠가 원룸이사 사장님보다 더 일을 많이 하는 걸 보고 트럭 사장님 수고비의 두 배를 보내왔다.
우리 또래가 그렇듯, 남편은 곧 다가올 퇴직 후에 무슨 일을 하며 살(놀)까 고민 중이다. 여태 머리만 쓰는 일을 했으니 몸을 쓰는 일을 해 보고 싶다고도 했었다.
그 생각이 나서 남편에게 '1톤 트럭 가지고 원룸이사 전문 기사 하는 건 어떠냐'고 장난 삼아 물었더니, 별로 안 힘들었다고 할 만하단다. 딸이 준 수건을 목에 두르고 땀을 꽤 흘렸는데 기분은 좋아 보였다.
집 안에 할 일이 없어 살짝 실망한 남편은 집 밖에서 일을 찾았다. 집은 리모델링을 깨끗이 했지만 아파트 자체는 재건축 선도지구 지정을 위한 주민 동의서를 받는 구축이라 여기저기 오랜 세월의 흔적을 드러낸다.
남편의 눈에 현관 앞 복도에 바닥 타일이 떨어져 덜걱거리고 있는 게 딱 걸렸다.
떨어진 타일을 모양에 맞춰 정성껏 붙이는 남편을 보니 퇴직 후에 몸 쓰는 일을 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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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바닥 타일을 붙이는 이사 요정님
작은애의 이사 때 남편은 이삿짐 나르기뿐 아니라 청소도 많이 했다. 유리창과 방충망을 말끔하게 닦아내는 남편의 모습에서 얼마 전에 본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생각났다.
주인공은 도쿄의 공공 화장실 청소부다.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일하고 돌아와 쉬는 단순한 루틴을 살아간다. 특히 화장실 청소라는 임무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주인공은 자기 일에 온 마음과 전력을 다 한다. 희끗한 머리와 주름진 얼굴을 가진 그는 상처로 남은 과거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데 원래부터 청소 일을 하던 사람이 아님은 분명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 남편은 내가 없이 혼자 산다면 딱 저런 모습으로 살 것 같다고. 남편이 나 없이 혼자 잘 살면 서운할까, 대견할까.
다음번 직업으로 1톤 트럭 이사 서비스에 그치지 말고 이사 후에 초깔끔 청소까지 해 주는 업체를 차려볼까? 하지만 나는 홍보 및 예약과 일정 관리만 할 수 있다. 나야 물론 같이 일을 하고 싶지만 손가락 관절염과 척추관 협착증 때문에 못 한다.
나는 지병을 핑계로 딸들의 한여름 이사에 어떤 요정도 돼 보지는 못하고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입만 나불거리다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