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을 '재해석'한다
오래된 모임이 있다. 선후배들이 함께 운동을 핑계로 십수 년이 지나도록 만나온 모임이다. 그 모임의 멤버 중 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코로나와 내 상황으로 인해 이삼 년째 모임이 멈춰져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를 묻는 전화였다.
만남도 없이 정기모임으로 계속 대기(?)하고 있는 데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 그 친구가 한 말의 요지였다.
내 생각을 묻길래 난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다는 대답을 했다. 그래도 그 친구는 나의 구체적인 의견을 바라는 듯한 얘기를 계속했고, 결국에는 그 친구가 바랬을 대답을 해 주었다.
통화는 내게 여운을 남겼다.
"왜 그랬을까? 그 친구는"
곱씹어 보니, 그 친구가 그렇게 이야기한 것은 불확실성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 친구의 직업과 그것에 익숙해진 그 친구의 생각 구조가 만든 행동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확실'
현대인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있다. 투자가 되었든 관리가 되었든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불확실한 상태로 남겨져 있는 것을 용인하지 못한다.
불확실은 '만고의 적'이다
말깨나 한다는 누구든 마이크만 잡으면 '불확실의 퇴치'를 외치고, 청중들은 그것에 박수로 응답한다. 나도 학교에서 책에서 그렇게 배웠다. 그리고 나도 똑같이 불확실의 반대편에 섰었다. 오랫동안 그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 들어, 그 불확실이 다른 느낌과 온도로 다가온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불확실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무슨 일이 있을까?"
아마도,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불확실을 싫어하는 걸까?
"왠지 찜찜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과 예측에 아직 결정되지 않은 변수가 존재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새로운 변동을 경계하는 것이다. 예측을 하고 설명을 하는 사람, 특히나 전문가라고 불리고 싶은 사람들은 '시작은 이렇고.. 과정은 저러하며.. 그래서 끝은 그렇다..'라고 명료하고 깔끔하게 설명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변수라는 것이 논리를 꼬이게 한다. 변수라는 것, 그것을 가져온 불확실, 여간 불편한 놈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 나는 그 '불확실'이 좋다. '확실'보다 더.
서두에서 언급했던 친구와의 통화 건도, 그냥 놔두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 만날지? 어디서 만날지? 만나긴 할지? 끝내 만나지 않을지?..."
그런 불확실한 상태를 그냥 놔두면 어떻게 될까?
비록 만나지 못하더라도 나는 계속 그 모임의 멤버일 것이고, 나를 포함해 모임의 구성원들은 소속감이라는 유대를 공유할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물론 그러다 언젠가는 그 모임도 사그라지겠지만.
같이한 세월이 길고 그만큼 정도 들어버린 모임이었기에, 그냥 놔두는 것으로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그대로 놓아두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처럼 불확실은 내일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나 새로운 기대의 다른 말일 수 있다.
새로운 변화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요즘의 나는 알지 못하는 새로움을 끌고 올 수 있는 불확실이 반갑다. 불확실은 언제나 지루함과는 반대 편에 있다. 그래서 좋다.
불확실이 있기에, 사람들은 내일을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불확실에 좀 더 관대해 보는 건 어떨까?
그러면 아마도,
여유를 하나 더 늘린 나를 만날 수 있을 것도 같다.
확실히,
불확실은 여러 얼굴을 가졌다.
어떤 얼굴이 불확실의 진짜 얼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