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관한 고찰

손에도 표정이 있다

by Janet M

어느 날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려는데 싱크대 한쪽 구석에

까만 콩 같은 무언가가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릇들을 씻는데 날아온 물세례를 받고 그 콩만 한 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의 정체는 달팽이였다.

그날 저녁 삼겹살을 구워 먹었는데, 아무래도 상추를 씻으면서

그 속에서 떨어졌나 보다.

대단한 생명력이 아니겠는가.

어떤 밭에서부터 도매상점까지, 그리고 마트에서 우리 집까지.

용케도 살아남은 이 작은 생명체가 기특하기도 하고 키우자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조금 어설프지만 작은 플라스틱 통과 냉장고에서 꺼낸 상추 잎 몇 장으로

달팽이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인터넷으로 '달팽이 키우는 법'에 대해서도 검색해보았다.



- 작은 플라스틱 통에 화단용 흙이나 달팽이 전용 매트(코코피트, cocopeat)를 깔아주세요.

- 건조하지 않도록 흙이나 매트를 물로 축여주고 습도 유지를 위해 간간히 물을 분무해주세요.

- 달팽이는 상추나 오이, 호박 같은 채소를 좋아합니다.

- 낙엽 조각을 뿌려주면 그 밑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넣어주면 훌륭한 놀잇감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보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렇게 이 작은 생명체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달팽이는 평소에는 전혀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잠시 집을 비웠다가 돌아올 때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갉아먹은 상추 잎 흔적들과

이곳저곳에 배설물을 묻혀놓음으로써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아주 가끔씩 말라버린 물을 채워 넣어주거나 신선한 야채들을 넣어줌으로써

이 생명체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가끔씩 달팽이가 보이지 않을 때면 상추 잎을 들춰보면서

일부러 생사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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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들에 대한 고찰.

나와 하루를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하물며 어느 날 갑자기 내 옆에 나타난 이 작은 생명체 한 마리조차도

내 일상을 변화시키고 있지 않은가.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을 숨기기 위해

자기 몸집의 몇 배나 되는 커다란 상추 잎 속으로 몸을 숨겼을지도 모를

이 달팽이를 찾기 위해 상추 잎을 펄럭 들춰보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더듬이 같은 눈이 신기해

손으로 콕 건드려보기도 하고,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며 관찰하던 사람들 때문에

이 작은 생명체는 얼마나 큰 상처와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관계가 속박이 되고 집착이 되면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며 좋은 사이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편한 사이라고 해서 상대의 특성을 무시한 채

무작정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가두며 그 안에 맞춰지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는 그 관계가 틀어졌을 때 일방적으로 그를 밀어내거나

또 새로운 존재를 찾아 쉽게 떠나버리지는 않은가.



사람 사이 사람, 관계 속 관계.

언뜻 보면 이런 관계들은 몇 번에 걸쳐 꽉 묶인 단단한 매듭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단 한 번의 절단만으로 풀어질 수 있는

위태로운 관계이기도 하다.

완전하지 않다면 유연함을 늘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둘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을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지난 초가을, 아이가 유치원에서 또다시 달팽이를 가지고 왔다.

생태체험 시간에 달팽이에 관해 배웠고 두 마리씩 집으로 가져가서

길러보는 것이 학습목표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좀 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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