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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t M Feb 12. 2022

관계에 관한 고찰

손에도 표정이 있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려는데 싱크대 한쪽 구석에

까만 콩 같은 무언가가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릇들을 씻는데 날아온 물세례를 받고 그 콩만 한 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의 정체는 달팽이였다.

그날 저녁 삼겹살을 구워 먹었는데, 아무래도 상추를 씻으면서

그 속에서 떨어졌나 보다.

대단한 생명력이 아니겠는가.

어떤 밭에서부터 도매상점까지, 그리고 마트에서 우리 집까지.

용케도 살아남은 이 작은 생명체가 기특하기도 하고 키우자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조금 어설프지만 작은 플라스틱 통과 냉장고에서 꺼낸 상추 잎 몇 장으로

달팽이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인터넷으로 '달팽이 키우는 법'에 대해서도 검색해보았다.



- 작은 플라스틱 통에 화단용 흙이나 달팽이 전용 매트(코코피트, cocopeat)를 깔아주세요.

- 건조하지 않도록 흙이나 매트를 물로 축여주고 습도 유지를 위해 간간히 물을 분무해주세요.

- 달팽이는 상추나 오이, 호박 같은 채소를 좋아합니다.

- 낙엽 조각을 뿌려주면 그 밑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넣어주면 훌륭한 놀잇감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보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그렇게 이 작은 생명체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달팽이는 평소에는 전혀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잠시 집을 비웠다가 돌아올 때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갉아먹은 상추 잎 흔적들과

이곳저곳에 배설물을 묻혀놓음으로써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아주 가끔씩 말라버린 물을 채워 넣어주거나 신선한 야채들을 넣어줌으로써

이 생명체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가끔씩 달팽이가 보이지 않을 때면 상추 잎을 들춰보면서

일부러 생사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관계들에 대한 고찰.

나와 하루를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하물며 어느 날 갑자기 내 옆에 나타난 이 작은 생명체 한 마리조차도

내 일상을 변화시키고 있지 않은가.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을 숨기기 위해

자기 몸집의 몇 배나 되는 커다란 상추 잎 속으로 몸을 숨겼을지도 모를

이 달팽이를 찾기 위해 상추 잎을 펄럭 들춰보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더듬이 같은 눈이 신기해

손으로 콕 건드려보기도 하고,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며 관찰하던 사람들 때문에

이 작은 생명체는 얼마나 큰 상처와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관계가 속박이 되고 집착이 되면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며 좋은 사이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편한 사이라고 해서 상대의 특성을 무시한 채

무작정 내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가두며 그 안에 맞춰지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는 그 관계가 틀어졌을 때 일방적으로 그를 밀어내거나

또 새로운 존재를 찾아 쉽게 떠나버리지는 않은가.



사람 사이 사람, 관계 속 관계.

언뜻 보면 이런 관계들은 몇 번에 걸쳐 꽉 묶인 단단한 매듭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단 한 번의 절단만으로 풀어질 수 있는

위태로운 관계이기도 하다.

완전하지 않다면 유연함을 늘 염두에 두는 것이 좋다.


둘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을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지난 초가을, 아이가 유치원에서 또다시 달팽이를 가지고 왔다.

생태체험 시간에 달팽이에 관해 배웠고 두 마리씩 집으로 가져가서

길러보는 것이 학습목표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좀 더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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