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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긍정 Sep 10. 2023

출근 대신 출석하는 삶.

스피닝을 할 때 내가 하고픈 이야기

지난 글 <그렇게 시작된 갭먼스 또는 공백기>와 이어지는 글입니다.

이 글의 BGM으로는 슈퍼주니어의 <Mr. Simple>을 권합니다.


세상이 내 맘대로 안 된다고 화만 내면 안 돼
그럴 필요 없지
걱정도 팔자다 작은 일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
몸에 좋지 않아

- Mr. Simple 가사 中




퇴사 후 멀어지게 되는 것

지옥철 그리고 루틴


지난 글에서와 같이 나는 퇴사와 동시에 출판 계약을 하게 되었고, 원페이저 대신 내 책을 쓰는 삶을 살게 되었다.

사실 퇴사를 하면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오랜 프리랜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루 24시간을 오롯이

나에게 쓸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면,

인간은 나약하게도 아침을 잃어버린다.


출근 시간 걱정 없이 "푹 잘 수 있다"는 마음이 습관이 되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패턴이 자리 잡힌다. 나의 하루에 오전이라는 시간대는 증발해 버리고, 이따금 생각나는 회사에서의 오전을 돌이켜보며 죄책감이 싹튼다. 쌓인 죄책감은 나를 더 무기력하게 만들고, 집 밖은커녕 이불 밖으로도 나를 나오지 않게 만들었다.


그냥 이불에 파묻혀 자는 게 편했다.
꿈에서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으니까.

그때부터 잠은 '현실도피'의 수단이 된다.





당근마켓의 순기능


그날도 어김없이 오후 1시에 일어나 뉴스를 보는데, 마치 내 얘기인 것 같은 한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일하지 않는 은둔청년 문제가 심각한데, 우리나라 특히 서울의 청년들도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근로자도 아니고 취업준비생도 아닌 "그냥 쉬는" 청년들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9월인 현재는 해당 기사가 많은 뉴스에서 보도되며 우리나라 사람들도 다들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당시의 나는 4월 경이었다.


혼자 사는 1인가구 청년들은

먼저 도움을 구하지 않는 이상

홀로 고립되어,

더 깊이 무기력해질게 뻔했다.


부엌엔 먹다 남은 컵라면이 종류별로 쌓여있고, 방바닥엔 발 디딜 틈 없이 옷가지와 배달 용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뉴스 속 은둔청년의 집 상태가 우리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처음엔 방청소를 시작했다.


이불 빨래도 했고, 조립된 가구도 해체해 가며 내게 당장 필요치 않은 것들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버릴 건 버리고, 버리기 아깝지만 쓰지 않을 것 같은 물건들은 예쁘게 사진을 찍어 중고거래로 팔았다. 나를 집 밖으로 꺼내준 것은 의외로 '당근마켓'이었다.


물건을 팔기 위해 깨끗이 씻고,

날씨에 맞는 옷을 꺼내 입었다.

집 밖으로 나가 소소한 대화를 나눴고,

그 돈으로 맛있는 간식을 사 먹었다.


그렇게 중고거래를 위해 조금씩 집 밖으로 나가게 되었고, 덕분에 나는 41.4도의 따뜻한 이웃이 되었다. 나간 김에 카페에 들러 책을 읽고 오거나 미용실을 다녀오는 등 일상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과 함께

출근 대신 출석하는 삶


일상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아침에 꼭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하루가 '시작' 될 것 같았다.


어떻게 환경을 바꿀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나는 운동을 택했다. 직장 생활할 때 회사 복지로 스피닝을 배웠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좋게 남아있었다. 스피닝은 음악을 틀어놓고 박자와 가사에 맞춰 서서 자전거를 타는 유산소 운동인데, 스트레스 해소와 도파민 충전에 꽤나 큰 역할을 했다. 나는 다시 스피닝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침 9시 20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나는 스피닝장으로 향했다. 지하철역 출구에서 나와 우르르 직진하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 사이를 지나, 몸에 딱 달라붙는 헬스복 차림의 나는 정확히 그들의 반대 방향으로 길을 걸었다. 같은 시간 속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길을 걸어가는 그 모양새가 꽤나 내 상황과 닮아있었다.



아침 9시 45분

아침에 일어나 향할 곳이 있다는 것,

도착한 곳에 오롯한 내 자리

아니 자전거가 있다는 것은

묘한 소속감과 안정감을 줬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과 서로 가벼운 인사를 건넸고, 다들 익숙하게 자기 자리 아니 자전거에 올라탔다. 직장인들이 뇌를 깨우기 위해 모닝커피를 준비하듯, 우리는 칼로리를 효율적으로 태울 버닝커피를 준비한다. 몸과 마음의 준비를 끝내면 강사님은 한 명씩 이름과 함께 출석을 불렀다. 출근 대신 출석하는 아침의 삶은 꽤 나쁘지 않았다.


내가 사랑했던 아침의 햇살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나의 페이스에 맞게 달릴 것



오전 10시

스피닝은 정박에 맞춰 꾹꾹 눌러 타기도 하고, 2배로 빠르게 재생하여 허벅지가 터질 만큼 발을 구르기도 한다. 주로 케이팝 노래 가사에 맞춰 쉬운 손동작을 따라 하기도 하고, 온몸을 사용하여 웨이브를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왕초보라 박자에 맞게 발을 구르는 것, 가끔 타이밍에 맞춰 한 손을 든 안무를 흉내 내는 것 정도만 가능했지만 그래도 뿌듯했다. 내 양 옆에 위치한 고수들은 두 손을 번쩍번쩍 높이 들며 고난도 안무까지 선보였다. 원래의 성격 같았다면 "나도 얼른 레벨업 해야지!" 하며 서툴러도 따라 했을 텐데,


나는 스피닝을 통해

조급함을 내려놓는 것을 배웠다.

그들과 나를 비교할 필요는 없었다.

각자만의 페이스가 있는 거니까.  





직업만족도 200%라도

하기 싫은 일은 해야 했다.



오전 10시 40분

다 함께 음악에 맞춰 땀을 흘렸고, 이때 수업의 열기는 절정에 이른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강사님의 표정이었다.

뭐랄까. 키워드로 표현하자면

"직업만족도 200%의 얼굴" 같달까.


지하의 습한 공기, 축축하게 젖은 운동복 사이를 타고 비 오듯 흐르는 땀, 빠른 음악에 더욱 가빠지는 호흡, 체력의 저하 속에서 끌어내보는 근력과 도파민. 힘들면서도 짜릿한 그 뜨거운 열기 속에 강사님의 눈코입 모든 부위들이 "신! 난! 다! "를 외치고 있는 것 마냥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살면서 누군가 일을 하는데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는 듯했다. 일반적인 사무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정말 순수하고도 해맑은 표정이었다.



오전 11시

수업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카운터에서 엑셀을 켜놓고 문서 업무 처리를 하는 강사님이 보였다. 인사를 하러 다가갔는데, 아까 그 직업 만족도 200%의 표정은 어디 가고 동태눈깔과 내려간 입꼬리 만이 남아 있었다. 선생님;; 아까랑 표정이 너무 다르신데요;;


아. 각자만의 페이스만큼이나 중요한 깨달음이 있었다. 아무리 직업만족도 200%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더라도, 모든 일이 행복한 것은 아닌 것이다. 스피닝 강사로서 행복을 느끼는 동시에,

스피닝 클럽의 보존을 위해선 서류 작업도 해야만 했다. 그것이 그의 책임이자 역할이자 일이었다.


일이란 그런 것이다.

매번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없고,

하기 싫은 일도 해내야 한다.





어쩌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더 많이 해내야 할 수도 있다. 스피닝 장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출근을 하든 출석을 하든 중요한 것은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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