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심씨네서(10일째)
수돗가 장독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강낭콩을 깐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아래 월출산 자락이 날 건너다본다. 서울 12층 아파트 거실에서 바로 보이는 남산의 남산타워는 늘 뿌옇게 보였다. 시골에선 산도 선명한 검푸른 빛에 행복해 보인다. 서늘한 바람이 뜨거운 햇빛에 물러나고 있다. 강낭콩 한 줌에 조 한 줌을 넣어 밥을 안친다.
아직도 새들의 합창소리는 돌림노래처럼 끊이지 않는다. 시골살이 2주째, 잠깐 사는 거와 터 잡고 사는 것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잠시 머무는 것이니 모든 게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이제 다 떨어져 가는 더치커피 한 잔도 서울에서 먹는 거와 다르다. 노동후 낭만을 살짝 넣어 혼자 마시니 그 맛이 환상이다.
늘 그렇듯 길심씨는 아침 밥상에 또 지각이다. 성수씨는 퉁생이를 놓는다.
"참~ 아이고, 뭣하고 인자 와? 응"
"얼른 먹소."
"난희 엄마는 딸이 밥해주고 빨래해 주고 살림 다해주니 좋겄네. 딸이 해주니 밥도 많이 먹구만."
"아버지, 내가 또 언제 와서 이렇게 있겄는가? 히히"
"그라제. 내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겄냐."
성수씨는 60부터 아니 그전부터 여전히 죽음 타령이다. 길심씨는
"나는 조오타."
한다. 두 분은 처음엔 딸이 서울에 안 가고 시골에 있으니 동네 사람 눈도 살피고 은근히 걱정을 하더니 이제는 좋아한다.
이제 우리 셋은 모든 것에 익숙해지고 있으며 나는 시골살이에 좋은 몇 가지가 늘어만 간다. 너무 길어지면 독이 될 수도 있으려나. 그중 편리하고 좋은 몇 가지를 적어봤다.
새들과 풀벌레들의 합창 알람
스마트폰으로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요리 레시피도 찾아보고, 카톡도 하느라 데이터도 얼마 안 남았다. 음악 감상이나 라디오도 못 듣는다. 그나마 새들의 합창소리가 아침 알람이요 자연 음악소리다. 높은 곳, 나뭇가지에 자리한 새들의 합창과 낮은 곳, 풀숲에 숨어있는 풀벌레들의 합창이 어우러져 여기서는 나에게는 훌륭한 자연 음악이 된다.
텃밭 냉장고
서울 집에서는 요리할 때 냉장고에서 꺼내야만 하는 야채, 과일들이 여기선 마당가 텃밭에 널렸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상추, 가지, 오이, 고추, 부추, 깻잎, 미나리, 호박, 머위대, 대파, 수박, 참외, 방울토마토가 그것이다. 전기냉장고에 무언가 쌓여 있으면 썩어 나갈까 전전긍긍하며 가끔씩 냉장고 파먹기를 했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애써 농사지은 것을 못먹고 버리게 될까봐 냉장고 파먹기 하듯 열심히 텃밭냉장고를 뒤져 야채반찬을 만들어댄다. 하지만 길심씨는 야채가 넘치면 넘치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썩어나가면 또 그대로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사방팔방 터진 넓은 수돗가 세탁실
이불 빨래하느라 세탁기를 두어 번 돌리기는 했으나 거진 장독대 옆 수돗가에서 손빨래를 한다. 수건을 빨기도 하고, 내 옷은 물론 일하고 들어와 벗어놓은 성수씨의 작업복을 지하수를 콸콸 틀어 세탁한다. 길심씨는 일복을 벗어 직접 빨고 사방팔방 터진 수돗가에서 목욕까지 한다. 지하수라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시원한 물로 한바탕 빨래를 하고 나면 더위도 가시고 마음까지 깨끗해진 듯하여 한없이 기분이 좋다. 수돗가 세탁실에서라면 두다리를 쭉 뻗고 빨래의자에 앉아 하루종일이라도 빨래를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빨랫줄 햇빛 건조기
서울에서도 건조기를 쓰지 않는 나는 여기선 1시간이면 뽀송하게 마르는 햇빛 건조기를 쓴다. 수돗가에서 빨래를 해 바로 위에 쳐 놓은 빨랫줄에 널면 그만이다. 돈 안 들이는 자연건조기다. 폭염에 햇볕이 강하여 너무 오래 두면 옷 색깔이 바랜다고 길심씨는 늘 빨리 걷어 들인다. 나는 뽀송하다 못해 까상한 느낌이 좋아 오래 둔다.
도마, 행주, 수세미 자연 소독제
행주를 삶을 필요도 없다. 설거지 후 도마, 행주, 수세미를 들고 나와 장독대 항아리 뚜껑 위에 올려놓는다. 햇빛이 자연 소독제이다. 햇빛은 뜨겁지만 시골살이에 요긴한 녀석이다. 한낮엔 너무 뜨거워 억척스러운 성수씨, 길심씨도 쉬어가게 한다.
시골살이 하며 좋은 것들의 대부분은 햇볕이 해내는 일이며 농사에 팔 할도 그의 몫이라지만 내 얼굴, 팔다리에 오는 그는 반길 수가 없다. 그에게서 나오는 자외선이 무섭다. 그래서 일할 땐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꽁꽁 싸맨다.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겠다. 햇볕! 고맙다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