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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홍 Mar 05. 2024

헤어졌으니, 막살 거야

10년 만난 사람과 이별했다


    





그와 헤어지고 얼마나 지났을까.




한동안 마음대로, 아니 막살았다. 10년 가까이 만나던 조강지처, 아니 조강지부를 버렸으니 나는 막살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은 술을 진탕 마시고 혼자 꺼이꺼이 울다가 어느 날은 미친 사람처럼 하루 종일 실실 댔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주위에서 '첫사랑은 원래 망하는 거다 '결혼까지 안 가길 잘했다' 등의 근거 없는 말들을 수집하며 우리는 어차피 끝날 운명이었다고 자위했다. 그럼 잠시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야, 차라리 잘 됐어! 너 맘고생 많았잖아. 잊어! 세상에 널린 게 남자다"

".... "

"결혼 안 할 거면 그냥 빨리 헤어지는 게 나아"

"맞아. 난 결혼 못할 거야"

"됐고, 소개팅이나 할래? 거래처 사람인데 점잖고 괜찮아. 한번 만나나 봐"

"됐어"

"그냥 만나나 봐- 아님 말고"




그래, 이래나 저래나 괴로운 마음. 나가나 안 나가나 어차피 똑같은 인생.




남자들은 친절했다. 매너가 좋았다. 온통 그였던 세상에서 벗어 나니 바깥은 마치 거대한 기회의 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너무 한 사람만 보고 살았나... ' 우물 안 개구리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한편으로 자유롭기까지 했다.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아본 지 오래였다. 이런 기분이었나 보다, 설렘 비슷한 감정이. 그 후에도 몇 번 소개팅을 더했다. 불편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볼 근육이 땅겼다. 집에 돌아오면 묘하게 허기가 졌다.




하지만 진지한 만남으로는 이어지진 못했다. 누군가 관심을 표하면 ‘얼마나 봤다고?’ 꼬아 생각했고 괜찮다 싶으면 어김없이 단점을 찾아냈다. 실은 매번 비교하고 있었다. 그와 다른 이들을.       




'그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해주었을 텐데. 그 사람은 이러지 않았는데. '      



스스로를 테스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자로서 어떤지, 다른 사람도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지, 그 사람처럼.








"근데 너 진짜 왜 헤어졌어? 생각해 보니 나한테도 말 안 해줬다, 너"

"10년 만났는데 이유가 어디 있냐. 안 헤어진 게 이상하지"

"흐음... 아니야. 너 뭐 있어"




베프라는 녀석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쪽팔린 가정사.




엄마는 공황장애, 아빠는 알코올 의존증.



일 년 넘게 이유 없이 응급실을 오가는 엄마가 이상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나오는 진단은 협심증. 하지만 정밀 검사를 해보면 이상이 없었다. 저녁에 걸려오는 아빠의 전화에 심장이 덜컥해서 받아보면 늘 병원이었다.



협심증은 아니다. 외상도 없다. 너무 답답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공황장애 같았다. 안 가겠다는 엄마를 붙들고 정신의학과에 갔을 때 만성 우울증과 스트레스로 인한 공황장애가 의심된다고 했다.



'그럼 그렇지...'




나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삼십년이 넘도록 누구 하나 질 줄 모르고, 그렇다고 헤어질 줄도 모르는 지긋지긋한 부모의 투닥거리. 엄마가 응급실에 가는 날은 둘이 싸운 날이 분명했다.



터져야 할 게 터진 것뿐이었다. 고민 끝에 가족들과 상의해서 아빠를 알코올 치료 병원에 보내기로 했다. 죽어도 안 가겠다던 아빠를 몇 날 며칠 겨우 겨우 설득해서. 아빠가 집안의 물건을 모두 다 박살 낸 그 밤.



“두 달간 면회는 안 됩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외출도 금지고요 “



알코올 의존증에는 별다른 약이 없다. 그저 중독을 일으키는 술로부터 멀어지는 게 치료이자 약이다.



“혈압 때문에 드시는 약이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은 직접 병원에 가셔야 해요”

“일주일 전에 미리 연락 주세요. 보호자님이 오셔서 담당교수님 뵙고 외출증 받으시면 됩니다. 그 외에 외출이나 면회는 불가합니다"




선생님의 말투는 꽤나 사무적이었다. 오히려 안심이 됐다.




한 달 후 혈압약 처방 때문에 아빠를 데리러 갔다. 외출증을 끊고 선생님을 만났다.




"다행히 잘 지내시는 것 같아요. 특별히 건강에도 이상은 없고요"

"하아, 다행이에요"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요. 오늘 검진받으시겠지만. 병원 갔다 바로 오시고요 외부 음식 드시는 것도 안 됩니다"

"네..."



차갑고 단호한 교수님의 말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그동안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겨운 가족사도 꼬일 대로 꼬여버린 내 인생도.








아빠를 데리러 갔다. 그는 1층 로비에 얌전히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생신 때 사드린 네이비 블루종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아빠!"



괜히 미안한 마음에 이름을 크게 불렀다. 다행히도 얼굴이 좋아 보였다.




"얼굴이 좋아졌네?"

"... 술 안 먹으니까"

"있을 만하고?"

"응, 그럭저럭. 이제 술은 안 마실 거야. 근데 과자를 많이 먹어"



아빠는 수줍은 듯 웃었다. 귀가 다 빨개져 있었다. 마치 소년처럼.



검진을 받고 다시 돌아오는 길.



"아빠, 혈압이 더 높아졌대. 이제 군것질은 안 돼요. 조금만 참으세요"

"술을 안 마시니까 자꾸 뭔가 먹고 싶어"

"그래도 안 돼. 다른 걸 찾아볼게"

"... 그래"

"갈게요"

"... "  



"OO야"

뒤돌아 서는 나를 아빠가 불러 세웠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내 이름.



"응?"

"... 미안하다"



"... 또 올게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티 내지 않으려 발걸음이 빨라졌다. 문득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 건 무슨 이유였을까. 하필 이런 순간에. 가장 미워하는 사람 앞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생각나다니.




아빠를 병원에 보낸 후, 나는 그에게 헤어지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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