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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홍 Mar 12. 2024

내 남자도 아닌데, 확 망해버려!

도대체 왜 잘 되는 건데






‘진정한 사랑이란 게 있을까...?’      



그 시절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다. 진짜 사랑이라는 게 있을까, 변하지 않는 사랑이란 게. 지겹게 싸우면서도 30년 넘게 헤어지지 못하는 부모님, 그렇게 오래 만난 사람에게 한순간 돌아선 나. 정말 사랑이란 게 있기나 할까.             

    



더 바쁘게 살자 다짐했다.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 없이 매일매일 새로운 일을 만들고, 좀 더 나에게 집중하며 살기로. 없던 취미도 억지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취미란 그 사람 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걸 해봐야겠다 싶었다.      



헬스장도 끊고 테니스도 시작했다. 쇠든 공이든 열심히 들고 칠 때면 괴로운 생각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즈음 집에 새로운 식구도 생겼다. 친구가 장기 출장을 가면서 맡긴 강아지였다. 준이는 이제 막 청년기에 접어든. 허리가 소시지처럼 긴 갈색 닥스훈트였다. 토요일 오후 늦은 점심을 먹고 바람도 쐴 겸 준이를 데리고 나갔다. 공원으로 들어서기 전 준이는 풀 숲에서 열심히 뭔가를 찾고 있었다.




"준아- 그만 가자. 거기 뭐 없어"




그때였다. 저 멀리 익숙한 모습의 누군가 보였다. 자잘한 진녹색 체크무니 셔츠. 자전거를 타고 셔츠를 휘날리며 빠르게 이쪽으로 오고 있는 누군가. 멀리서도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였다.







맞다. 분명히. 빠르게 가까워지는 그를 보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얼어버렸다.      



‘뭐야, 여기 왜 있지?? 잠깐만, 어떻게 하지? 못 본 척해야 하나??’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문득 얼마 전 친구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너 그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OO오빠. 동네에 가게 냈대”

“뭐? 가게?”

“응, 저기 사거리에 새로 생긴 와인바. 버스 정류장 가는 길에, 한참 공사하던 곳”

“아, 어.. 어. 맞아. 무슨 어두운 술집 있던 곳”

“어, 거기 새로 오픈한 집, 그 집 사장이 오빠래”

"... 누가 그래?”

“현지가 얼마 전에 갔다가 만났다고 하더라”     




‘와인바라...’      




학창 시절부터 머리보다는 행동이 빨랐던 사람이다. 공부에는 큰 뜻이 없었고 집안 사정 때문인지 대학교는 졸업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아버지의 일을 돕더니 지인의 소개로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 주류 회사 영업직. 힘든 일이었다.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야 끝나는 일.        


   

“오빠, 나중에 장사 같은 거 해보는 거 어때?”

“장사?”

“응. 술집 같은 거. 술은 오빠 회사에서 받으면 되고 가게는 지민오빠 일 도와줘서 대충 알 거고”     


 


일찍부터 일어나 밤 11시에 퇴근하는 그를 보면 늘 안쓰러웠다. 회사라고는 다녀본 적 없는 나였지만 그의 피곤함이 눈에 훤했다. 주말에도 늘 전화를 붙들고 살았다. 나와 데이트 중에도 거래처에서 부르면 쪼르르 달려가던 사람이었으니.            


    


하지만 정말 가게를 냈다니. 가만, 근데 왜 이 동네야? 아무리 예전에 살던 곳이라고 해도, 왜 하필 여기에?      


            



휘잉-



그의 자전거가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휙 돌렸다. 꽈악, 나도 모르게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봤나?? 못 본 건가?? 하아...'

    



그는 정말 와인바를 차렸다. 그것도 우리 동네에. 집에서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버스 정류장을 가려면 그의 가게를 지나쳐야 했다. 비켜 가려면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내가 왜 그 때문에 돌아가야만 하는지 억울하고 화가 났다. 



'왜 이렇게 불편하게 하는 거야.. 정말...'     



그의 가게는 꽤 잘 됐다. 머지않아 동네 핫플이 될 정도로. 이제는 친구들도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나 친한 언니 만나는데 거기 가도 돼?'

"가아- 뭐 어때, 묻지 말고 가. 이제 나랑 상관없는데 뭘. "



마음은 불편했지만 뭐 어쩌랴. 사실 나도 궁금했다. 인스x에 들어가 그의 가게 계정을 찾았다. 이미 수많은 사진과 댓글이 수두룩했다. 



‘뭐야, 평생 SNS는 담쌓고 살더니…‘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동네에 이런 곳이 생기다니, 단골 예약'

‘사장님이 훈남인 곳’




‘헐… 정말 돌아왔구나’           




그 후 나는 가끔 울적할 때면 그의 가게를 찾았다. 나도 왜인지 모르지만 그냥 발길이 갔다. 그리고는 아무도 몰래 그의 가게를 몰래 훔쳐보다 돌아오곤 했다. 




무슨 마음인지는 나도 몰랐다. 그가 그리워서인지 변하지 않는 내 인생이 뭐 같아서 인지. 그렇게 한 달에 한두 번 그의 가게 건너편에서 멍을 때리다 돌아왔다. 




노란 조명에 커다란 샹들리에가 멋들어진 가게였다. 가게 안에는 하얀색 캔들이 잔뜩 있어 분위기가 더 아늑했다. 어두운 벽 한 편에는 늘 빔 프로젝트로 영화를 상영했다. 우리가 몇 번이고 돌려 보던 <이터널 선샤인>



장사는 엄청 잘됐다. '아주 부자 되겠네, 부자 되겠어!' 이상하게 심술이 났다. 그가 정말 잘되길 바란다고 생각했는데 노래 가사는 다 거짓말인 건가…






그날도 터덜 터덜 퇴근길에 그의 가게 앞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한참을 멍 때리며 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나왔다. 



'엄마야!'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낮췄다. 




그는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왔다. 그는 봉투를 버리고 곧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하나도 안 변했네. 살이 좀 빠졌나...?' 



처음이었다. 헤어진 후로 그를 이렇게 자세히 본 건. 잠시 후 그가 휴대폰을 어깨에 얹고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담배를 아직 안 끊었나 보네...'라고 생각한 순간, 그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봤다.



'히잌...!!!'  





분위기 좋은 그의 와인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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