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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홍 Mar 26. 2024

10년 만난 남친의 결혼소식

그것이 사실이라면










술이 달던 그 밤, 우리는 연거푸 몇 잔을 더 마셨다. 둘 다 얼굴이 벌게  질 정도로 취했지만 그는 나를 집으로 얌전히 들여보냈다. 나도 얌전히 집으로 들어갔다. 



함께 집으로 걸어가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가 말했다.




"우아아, 진짜 오랜만이다. 데려다주는 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로 웃었다. 나는 조용히 집에 들어가 씻고 바로 잠에 빠졌다. 빨리 자 버려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이후 우리는 가끔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정말 가끔 연락하고 가끔 보는. 친구도 연인도 아닌.  





“뭐 해? 퇴근했어?”

“아직. 오늘 일이 좀 남아서”

“저녁은?”

“먹었지. 오빤?”

“난 이제 먹으려고”

“밖에서?”

“응, 기훈이랑”

“아아. 그래, 맛있는 거 먹어. 난 아직 일이 안 끝나서 ㅜㅠ  수고하고”

“응, 수고!”





둘 다 몸을 사리는 게 분명했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더 이상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과거라는 망령 때문인지 그놈의 정 때문인지 묘하게 딱 잘라 끊진 못했지만. 




그마저 몇 번 더 볼 기회가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내가 보자고 하면 그가 일이 있었고 그가 보자고 하면 내가 바빠지곤 했다.







연애 대백과사전에 절대 변하지 않는 룰이 하나 있다. 헤어진 연인은 다시 만나도 헤어진다는 국룰. 그것도 같은 이유로.




둘 다 이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사귀는 와중에 열댓 번도 넘게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했으니. 게다가 우리는 결혼의 문턱까지 다녀온 사이 아닌가. 




나는 언제부턴가 다시 그의 가게 앞을 빙 돌아다녔다. 전처럼 억울하거나 화나는 감정은 없었다. 가게는 점점 잘 됐고 그는 점점 바빠졌을 뿐. 얼마 뒤 그는 2호점을 낸다는 소식을 전했다.




“우와, 이제 더 못 보겠네!”

“응, 아마도. 그래도 놀러 와. 가게로. 친구들이랑”
 “응 그럴게”




그렇게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우리는 점점 연락이 뜸해졌고 서로가 없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나는 그사이 연애도 하고 이별도 하고. 썸도 타고 그렇게 지냈다.



얼마나 됐을까, 그에게 다시 연락이 닿은 건  1년이 훌쩍 지나 서다.





"잘 지내?" 

"우아, 오랜만!" 

"시간 될 때 잠깐 볼까?”

"응, 주말에 괜찮아”




왜냐고 묻지 않았다. 알 것만 같아서.




“와, 오랜만이다. 얼굴 좋아졌네?”

“응, 그런가. 하하. 살이 좀 쪘어. 잘 지냈어?”

“나야 뭐. 요즘 동네는 아예 안 오나 봐?"

“응. 2호점에만 있어. 여기는 이제 매니저가 다 하니까”

“뭐야. 진짜 사업가잖아? 멋져어어어-"

“푸핫, 아니야”

“너무 잘됐어”

“고마워”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간 살아온 이야기, 앞으로 살 이야기. 그리고 물었다. 지난번 그때처럼.




“근데 왜...? 그냥 보자고 한 건 아닐 테고”

“맞아. 나 내려가. 지방으로”

“지방? 지방 어디?”

“전주”

“갑자기 왜?”




“가서 일 좀 제대로 해보려고. 3호 점도 내고”

“근데 왜 전주야? 오빠 전주 사람도 아니잖아.”

“음... 여자친구 집이 전주야. 같이 내려가”

“여자친구?? 여친??? 와아! 와! 와! 대박. 축하해”

“이제 고생 시작일 텐데 뭐, 허허”




우린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결혼해?”

“당장은 아니고. 근데 뭐 하겠지? 아직 잘 모르겠어”

“뭘 몰라. 그냥 빨리 해. 데려가 줄 때 '감사합니다' 하고. 그러다가 아무도 안 데려간다"

너는, 만나는 사람 없어?”

“응 마침 없네. 그냥 간간히 연락하는 사람은 있어"

"그래?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여자친구분은 누구야? 물어봐도 돼?”

“전에 말했던”

“어머! 그 열 살 연하분? 허얼. 헐. 대박! ”

“으응"

"다시?"

"그렇게 됐어”

“와! 너무 축하해. 진심이야. 진짜. 너무 잘 됐어”

“응. 고마워”




그는 웃었다. 소년처럼. 전 여친에게 말하는 게 영 쑥스러운 지 귀까지 빨개졌다. 아마도 예의라고 생각했겠지. 만나서 직접 말하는 게.




“그럼 이제 서울은 안 와?”

“당분간은. 거기서 바쁘지 않을까”

“러쿠나... 집은 구했어?”

“응, 구했어. 집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전주는 서울보다 집값이 싸”

“샀어??”

“응, 샀어”

"히잌!! 대박...!! 자가네! 축하해!! 경사다”




“나중에 놀러 와”

“하하. 알겠어. 안 가겠지만”

“하하. 맞아. 절대 안 오겠지?”

“응. 전주는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겠다

“그래, 오지 마. 너도 빨리 결혼해야지”




“흐음... 난 혼자 살다 죽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너 좋다는 남자 많잖아. 그만 따져. 그러다 진짜 늙는다”

“따지는 거 아니거든? 다들 내가 싫은 가봐, 왔다가 가네. 왔다가, 그냥 가. 크크”

“... 곧 만날 거야. 좋은 사람. 넌 예쁘고 똑똑하니까”

“뭐어래. 아빠인 줄”

“....”



우린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별 것도 아닌 말들에 깔깔대며. 순간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나에게 친구였고 연인이었고 오빠였고 아빠였던 순간으로. 그와 함께 있으면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모든 암울함을 잊어버릴 수 있던 그때로. 스무 살, 어릴 적 나로.



다행이다, 이 사람. 나 없이도 행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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