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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부터 만혼에 해당한다

30대 끝자락에 찾아간 결혼 정보 회사

by 새로운







“연애가 길어져서, 별 생각이 없어서, 이유야 다양하지만 이곳까지 찾아오신 분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신 거죠”



토요일 11시, 강남역 한복판에 위치한 결혼정보회사에는 나처럼 주말을 반납하고 아침부터 찾아온 사람들이 보인다. 잠시 상담실 문밖을 바라본다



“잘 오셨어요, 제가 만혼 전문입니다.”

"만혼이요?"

"네, 보통 36세 이상은 만혼이세요^^"



아... 30대의 마지막,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하고 간 결혼정보회사에서 만혼소리를 듣다니.



"나이치고 관리가 잘 된 편이세요. 저희 회사에는 딱 고객님 같은 분들이 필요해요"

"하하... 가.. 감사합니다"

"꼭 성혼되실 거예요. 저만 믿으세요"



상담 매니저의 달콤한 말들이 오른쪽 달팽이관을 지나 전두엽을 스쳐 다시 왼쪽 귀로 빠져나간다. 잠시 딴생각에 빠진다. 유리문 밖으로 상담을 온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경제력을 보실 거면 위로 8살 정도는 생각하셔야 해요”

“... 8살이요? 그럼 거의 50인데요?”

“자, 회원님. 생각해 보세요. 회원님이 경제적으로 걱정 없는 남성이라면 결혼할 때 뭘 보시겠어요?”



….



“나이와 외모죠. 직업? 크게 상관없습니다. 집안? 부모님 노후만 준비되어 있으면 돼요”

“저도 집은 있는데...”

“(오묘하게 웃으며) 아무튼 예쁘고 어리고, 성격까지 맞으면 최고겠죠?”



묘하게 설득이 됐다. 잠시 마흔 후반의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본다. 20대에 죽어라 고생하고 30대가 되니 사정이 좀 폈다. 40대에 드디어 원하던 부를 일구었다. 부모한테 받은 거 하나 없이 혈혈단신 여기까지 왔는데 어떤 아내를 바랄까?




“… 8살 위까지 괜찮을 것 같아요”

“회원님 직업이면 10%로 할인도 돼요. 이 분야 분들이 성혼율 높으시거든요. 분명 6개월 안에 성혼되실 거예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만 믿으세요.”



기분이 이상하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확신에 찬 말을 들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20대에 남자친구의 “오빠만 믿어” 이후 이렇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던 적이 없었건만. 어차피 하루하루 늙어갈 몸뚱이, 열심히 모아봤자 다 빠져나갈 돈. 경력이 20년이 넘는다는 그녀의 말만 믿고 일시불로 긁어버리는 건 어떨까.



“원하시는 이상형을 고려하면 원래는 ‘오마주’를 끊으셔야 하는데 조건이 나쁘지 않으시니 ‘프라이드’를 추천드려요. 대신 제가 매니저들에게 특별히 말해 놓을게요”



제일 기본단계는 400만 원이라고 한다. 그 위는 500만 원, 더 위는 700만 원. 1000만 원 대의 프로그램도 있는데 그건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며(‘너는 그 급은 아니야’로 들렸다). 두 번째 상품을 추천해 주었다. 나이와 성별에 따라 비용이 다를 줄 알았는데 매칭 매니저의 차이라고 한다.



“생각 많이 해봤자 시간만 가요. 하루라도 어렸을 때 가야죠. 조금이라도 더 예쁠 때”



잠시 고민하는 나에게 그녀가 한 방 더 날린다.



“경제력 보신다면서요, 나중에 성혼되면 예비 신랑분께 내달라고 하세요”







“오빠, 나 이거 사죠. 이것도, 저것도!”




‘오빠, 오빠’ 거리며 남자친구와 붙어 다니던 때가 있었다. 어린 난 그에게 온갖 애교를 피며 이것저것 사달라고 했고 그게 어떤 의민지도 잘 몰랐다.



결혼을 원한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의 아내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늘 결혼 근처를 어슬렁대기만 했을뿐 실제로 행복한 4인 가정을 꿈꿔 본 적도 없다. 남들처럼 ‘때 되면 하겠지’ 싶었지만 적극적으로 나선 적도 없었다.



그 마저도 파투가 나자 아예 포기한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혼자는 두려웠다. 이 나이 먹도록 혼자인 게 창피했다. 지나가는 연인만 봐도 부럽고 여전히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는 게 싫었다.




결혼하고 연락이 뜸해진 친구들이 섭섭했고 그럴수록 온 우주에 나만 혼자인 것만 같아 서글펐다. 점점 더 푸석해지는 얼굴도, 화장을 안 하면 ‘어디 아프냐’는 말을 듣는 것도 마치 생의 위협처럼 느껴졌다.




그럴수록 남자들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남자라면 앞 뒤로 몇 살까지 커버가 가능한지 가늠해 보고 이 나이라면 어떤 여자를 좋아할지 상상했다. 어떻게든 어리고 예쁘고 생기 있어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블로그를 보며 좋다는 기초 화장품을 따라 사고 유튜브를 보고 과즙 메이크업을 따라 했다.



문득 내 인생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나이가 훌쩍 들었다. 이제는 쉽게 다가오는 남자도 없고 마음을 고백하는 사람도 없다. 점점 감정에 무뎌지고 설렘보다 익숙함이 더 좋을 때다.




사실 ‘이렇게 된 거 뭐 어쩌나’ 싶다. 딱히 싫은 사람도 없고 좋은 사람도 없는 맹숭맹숭한 일상이지만 그리 물리지만은 않다. 이제는 짭짤한 감자칩보다 무맛의 강냉이가 더 맛있으니.




월요일에 전화가 온 매니저는 5% 추가 할인을 제시했다. 내년에는 회원비가 인상된다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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