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론자의 운명론
“으아, 정말 미안해!!! 나 왜 못 들었지?!”
결국 10시가 다 돼서야 전화가 왔다.
'아침잠이 많나...?'
주말에도 6시만 되면 눈이 저절로 떠지는 나와 확실히 다른 사람이다.
“괜찮아. 덕분에 아침도 챙겨 먹었어"
“미안해. 혹시 저녁에 시간 돼? 저녁에라도 뛸래?”
저녁에는 약속이 있었다. 친구에게 말하면 흔퀘히 약속을 바꿔주었겠지만 왠지 모르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쩌지, 저녁에는 약속이 있어"
“아니야, 다음에 같이 뛰자”
“그래”
…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이것저것 대보며 고민했다. 함께 뛴다는 생각에 상의와 하의, 모자와 운동화까지 이리저리 대보고 맞춰 보고 갈아입을 옷까지 준비했다. 평소에는 잘하지도 않는 워터프로프로 메이크업에 옷과 어울리는 타월까지 봐두었건만…
그 후로 서로 별 말이 없었다.
정확한 마음은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두었다. 그와 연락을 주고받은 후 처음으로 맘속에서 뭔가 걸리적거렸다.
어색한 기운도 잠시, 그날 이후로도 우리는 매일 같이 연락을 주고받았다.
“잘 잤어?” 굿모닝 인사로 시작해서
“잘 자!” 굿 나이트 문자로 마무리하며.
점심엔 뭘 먹었고 저녁엔 누굴 만났는지. 서로의 소소한 일상을 사사로이 나누며. 마치 연인처럼.
함께 맛있는 걸 먹으러 가기도 하고 가볍게 커피도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물론 주로 운동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사실 어떤 대화 주제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시간이 쏜살처럼 흘러갔다.
회사에서는 죽어도 안 가던 그 시간이 말이다.
6시에 만나면 금세 8시가 됐고, 8시에 만나면 재빠르게 11시가 됐다.
우리는 둘 다 술을 마시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보냈다.
함께 있을 때 그는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멈추지 않았다. 어설프게 알았을 때는 그저
마루가 없는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은 한두 번 봐서는 모르는 법이다.
주제는 주로 운동이었다.
그는 운동이야기가 나오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쉴세 없이 떠들었다.
그럴 때면 나는 뭐라 뭐라 말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하나하나 긴밀히 관찰했다. 그의 말투와 숨결, 말할 때마다 잠깐 쉬듯 내뱉는 작은 미사여구까지.
그럴 때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말하고 있는 그의 얼굴만 보였다. 붕어처럼 뻐끔뻐끔 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있는 마치 매직아이처럼 전경과 후경이 바뀌며 그에게서 새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이 사람이 과연 내가 어설프게 알던 그 남자가 맞을까? 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난 거지..?'
조급하면서도 좋았고 이게 뭘까 싶다가도 아무렴 어때 싶었다.
그 후로 나는 머릿속에 그의 장점 폴더를 하나 만들어 이 남자의 좋은 점을 하나씩 수집해 나갔다.
마치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시장조사를 하며 파일에 숫자를 기록하듯 하나하나.
웃을 때 생기는 눈주름, 한쪽만 들어가는 보조개, 풍성하고 검은 머리(다행이지 뭔가) 그리고 커피잔을 쥘 때마다 선명해지는 전완근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더욱 흥미로운 건 이 모든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나는 대체로 남들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인생은 원래 혼자 아닌가' 혹은 '나만 아니면 돼'
내 인생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적인 마인드에, 인류애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던 내가 누군가의 삶이 이렇게 궁금해질 수가. 그를 알면 알 수록 나는 그가 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열심히 그의 데이터를 나만의 DB에 저장해 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은근히 겹치는 부분이 꽤 많았다. 그는 내 절친과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거기 산다고? 나 일주일에 한 번은 친구 집에 꼭 가는데"
“와, 세상 좁다. 진작 좀 알아둘걸. "
게다가 우리는 자주 가는 분식집도 같았다. 그의 집 근처에는 오래된 맛집이 많았다.
재개발로 사라져 버린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몇몇 가게는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도 OO거리가 있었어?”
"그럼 그때는 거리가 더 북적북적했어"
“그럼 OO 분식도 알아? 나 지금도 가끔 가는데”
“에이, 거긴 내 고등학교 때부터 단골 집이야 “
'뭐야, 이건 운명인가...?'
서로에게 마음이 있을 땐 모든 것이 운명처럼 느껴진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도 굳이 하나씩 의미를 부여해 가며. 우리가 왜 잘될 수밖에 없는지 우리가 왜 특별한 인연인지. 마음이 좇는 길을 머리로 설명하려 드는 것이다.
나는 그가 더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