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그 남자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고
나는 오빠 친구이자 아이돌 연습생의 연인이 되었다.
그의 튀는 외모 덕분에 어디를 가나 시선이 꽂혔다. 큰 키에 하얀 피부, 드레드를 땋은 머리, 그를 쳐다보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를 한번, 그리고 나를 흘끔 쳐다봤다. 나는 이런 시선이 싫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나중에는 이마저도 자랑스럽고 우쭐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 실컷 봐라, 이 사람이 내 남자 친구이다!' 속으로 생각하며.
하지만 얼마 뒤 그는 군대에 갔고 우린 이별을 맞았다. 나는 그의 군대를 기다리는 고무신이 되진 않았다.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걸.
그가 군대에 간 사이 준비 중이던 아이돌 그룹은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말았다. 1세대 아이돌의 시기가 지나고 회사를 먹여 살리던 걸그룹도 해체됐다. 그 와중에 함께 연습을 하던 팀원이 사고를 치면서 자연스럽게 팀이 해체됐다. 그렇게 그의 데뷔 계획 역시 공중분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그가 전역한 후, 우리는 정말 다시 만났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웠다. 이대로 헤어지는 게 이상하다 느껴질 만큼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 재회했다.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더 열렬히 사랑했다. 나는 잠시라도 그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우린 젊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돈 없는 20대였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우린 주로 길거리 데이트를 했는데 하루 종일 걸어 다니는 게 주된 일이었다. 할 일 없이 홍대, 삼청동, 명동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떡볶이도 사 먹고. 밤에는 사람 없는 공원 벤치에 몇 시간이고 앉아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그는 돈이 없어도 늘 나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어 했으니. 나에게 늘 최고의 것만 주려 했다. 그의 마음도 사랑도 모두 다 진심이란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나의 20대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는 내가 온 지구를 통틀어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내면의 고통으로 힘들어하던 청춘이었다. 밖에서는 늘 유쾌하고 사람 좋은 척했지만 안에서는 분노와 적개심, 열등감과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용광로처럼 들끓었다.
이 시기 나는 내 모든 문제를 가정의 불화로 결론지었다. 그게 마음이 편했다. 나는 부족한 자신을 받아들일 그릇이 안 됐고 그저 남 탓하기에만 급급했다.
부모님과 싸우다 집을 뛰쳐나온 날이었다. 추운 겨울밤. 잠옷 바람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와 추위에 떨고 있는데 생각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오빠.. 자?”
“아니 아직. 안 자?”
“응... ”
“... 설마 밖이야?”
“...”
“어디야? 지금 갈게”
조금 뒤 그가 왔다. 급하게 나온 차림이었다. 잠옷 바람에 운동화를 구겨 신고. 뛰어왔는지 몸이 뜨거웠다.
"왜 이러고 있어?"
"... "
"... 우선 어디 들어가자"
그는 곤란한 건 묻지 않았다. 항상 그랬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혹은 알아도 별 상관없다는 태도로 그저 조용히 안아줄 뿐이었다.
그 역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님 사업이 부도가 나도 한동안 가족들이 쫓겨가듯 이사를 다녔다고. 그 시기 그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3형제 중 형은 일찍 결혼해서 출가하고 누나는 등록금 때문에 대학을 가지 못했다.
나는 그가 너무 안쓰러웠다. 이 사람을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리고 알 것만 같았다. 그가 왜 그렇게 일찍 철이 들었는지, 왜 말을 아끼고 쉽게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지.
그래서 서로에게 더 끌렸던 걸까. 결핍과 결핍은 찰싹 달라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니까.
그는 생긴 것과 달리 어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날티 나는 외모와 달리 예의가 참 발랐다. 할머니 손에 자라서 그런지 어르신들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지하철에서든 버스에서든 무거운 짐을 들고 가시는 어르신을 반드시 도와드렸고 추운 겨울날 홍대 길거리에서 할머니가 파는 달고나를 모조리 사가지고 온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히익- 이게 다 뭐야?”
“달고나. 자기 많이 먹으라고”
“오빠 또 할머니 거 다 사 왔지”
“... 날이 너무 추워. 빨리 팔고 들어가셔야지”
“으이그… 잘했어! 착하다 내 남자 친구! 누나가 오늘 맛있는 거 사줄게!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오예, 삼겹살!”
그는 삼겹살을 제일 좋아했다. 구수한 된장찌개도. 물론 정작 맛있는 건 항상 그가 사줬다. 연습생을 그만둔 뒤 그가 버는 돈은 새벽에 아버지 가게를 도와드리는 것과 알바가 전부였지만 그는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려 했다.
함께 있으며 늘 따뜻했다. 누군가에게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도 복잡한 내 사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심이 됐다. 굳이 눈물을 보일 필요도 힘들다도 징징댈 필요도 없으니. 구차하고 찐득한 속내를 보이지 않아도 되었으니.
'일찌감치 시집이나 가버릴까?' 힘들 때마다 구원인 듯 도망치고 싶게 만들던 사람.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 아무도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만큼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 잘 드러내지 않는 속마음이나 감정, 복잡한 가족사까지 거리낌 없이 모두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나의 빛, 나의 사랑.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무르익어 갔다.
사진: tvN <선재 업고 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