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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운 Jan 03. 2024

마흔 딸과 예순셋 치매 여인

“엄마 그 이야기 어제도 했어”

 



“아니, 어제 윤우엄마는 며느리랑 여행을 같이 다녀왔대”

“어디로?”

“제주도로”      



어젯밤 엄마가 한 이야기다. 이번에도 처음 듣는 척할까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말을 꺼냈다.      



“엄마, 엄마 그 이야기 어제도 한 거 알아?”

“어머, 내가?”

“응, 엄마 요즘 자주 그래. 어제도, 엊그제도 그랬어”

“내가? 정말?”

“응”

“어머, 내가 요즘 정신이 없나, 왜 이러지”       


   

엄마는 마시던 커피를 들고 서둘러 주방으로 간다. 엄마의 특기. 곤란한 이야기는 피하기. 나는 휴대폰을 꺼내 ‘중년 여성 치매’를 검색한다. ‘암보다 무서운 치매’ ‘중년 여성 치매, 호르몬이 문제다’ ‘치매 어르신 돌보기’ 온갖 두려운 단어들이 떠오른다.         


    

엄마는 올해로 예순넷, 내년이면 예순다섯이다. 내가 마흔이니 부모님의 건강을 염려할 나이가 맞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엄마가 한 이야기를 자꾸 또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증상이 점점 심해졌다. 얼마 전에는 한 손에 전화기를 들고 휴대폰을 찾더니 식당에서 물건을 깜박깜박 두고 오기 시작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안 좋은 상상들이 들끓는다. 불현듯 몇 년 전 일이 떠오른다. 매일 같이 술을 마시던 아빠가 점차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작은 아빠와 돈 문제가 불거진 이후로 하루 애 꼭 술을 한두 잔 마시더니 점차 성격이 점점 난폭해졌다.


처음에는 반주겠거니 생각했지만 점차 상황이 심각해졌다. 술의 양은 점점 늘어났고 많이 마신 날은 어김없이 엄마와 싸우고 물건도 부시기 시작했다. 더 문제는 이 모든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온 가족이 총동원되어 아빠를 설득했다. 병원에서는 알코올성 치매가 의심되니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알코올성 치매에는 다른 약이 없다. 그저 술을 안 마시는 게 유일한 치료법이다. 아빠는 그렇게 약 두 달간 알코올 치료 전문 병원에 입원했다.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외출조차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환자들이 외출과 동시에 술을 다시 마시기 때문이다. 나는 아빠의 고혈압 정기 진료를 위해 2주에 한 번씩 병원에 갔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아빠는 전에 없이 살이 통통하게 올라 있었다. 술을 안 마시니 그렇게 군것질을 한다고. 웃음이 났다.


‘아, 다행이다’           




아빠가 입원해 있는 동안 엄마는 혼자 가게를 꾸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나름대로 힘들었다. 딱 두 달이었지만 나에게는 2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매일 같이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들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기간 나는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사는 게 전혀 재미없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회사가 끝나면 축 처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방문을 닫고 음악만 들었다. 우울하고 느린 감성의 노래를 반복적으로. 잠들 때까지. 그저 ‘아빠 문제로 마음이 좀 복잡한가..’ 싶었지만 검사지를 본 선생님은 우울증 약을 처방해 주셨다.            


나의 오랜 버릇이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최악의 상황부터 떠오르는 버릇. 조금이라도 안 좋은 생기면 어두운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버릇. 나쁜 일이 일어나면 나쁜 생각이 도화선처럼 번진다. 때로는 그 어두운 생각들이 불처럼 번져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인가 싶었다. 엄마의 건망증 이후로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끔찍한 미래가 그림처럼 떠올랐다. TV에서나 보던 심각한 치매 증상의 노인들, 자식들도 못 알아보는 모습, 집에 가는 길도 잊어버려 경찰서에 엄마를 찾으러 달려가는 내 모습까지 오버랩 됐다. 문득 아빠 문제로 상담받았을 때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이 떠오른다.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곤란해요. 생각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쁜 생각이 들 때마다 의식적으로 그 흐름을 멈추세요. 그리고 의식적으로 좋은 상상을 해보세요”     


선생님은 몸을 움직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우선 움직이면 생각의 흐름을 끊어낼 수 있다고. 자기 전에 좋은 생각만 하고 잠들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외치라고.       


‘모든 일은 잘 될 것이다. 모두 잘 풀릴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자리를 고쳐 앉고 눈을 감는다. 애써 생각을 고쳐보려 애쓴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는다. 잘 생각해 봐, 언제나 생각보다 잘 풀렸잖아. 걱정하지 마. 모두 잘 될 거야. 나는 안전해. 나는 괜찮아’       

 

생각해 보니 정말이었다. 언제나 내가 상상하는 그런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언제나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걱정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늘 어두운 미래를 떠올렸고 부정적인 생각이 앞섰다. 내 인생은 생각만 하면 암울했고 나는 언제나 실패를 달고 사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상상한 일들이 모두 일어났느냐, 그렇지 않다. 대입에 실패하고 재수 생활을 했을 때, 매일 같이 대학에 또 떨어질 걱정만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교사가 되기 위해 임용고사를 준비할 때도 늘 떨어질 일에 벌벌 떨었지만 나는 결국 선생이 되었다.      


이 나이쯤 돼서 결혼도 못했으면 온갖 궁상에 청승을 떨며 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난 꽤 살만하다. 사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내 인생을 힘들게 했던 많은 것들로부터 벗어나있기 때문이다.                 


잠시 심호흡을 가다듬고 좋은 기억을 떠올려본다. 눈을 감고 생각을 통제하려 애써본다.      



‘나는 괜찮다. 나는 안전하다. 모든 일은 잘 될 것이다. 모든 건 잘 풀릴 것이다’



엄마의 문제 역시 잘 해결될 것이다. 설사 엄마가 정말 중년 치매에 걸린다고 해도, 나는 이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나갈 것이다. 나는 아직 젊고, 엄마도 아직 젊다.       


다행히 아빠는 퇴원 후 많이 좋아졌다. 예전보다 식사도 잘하시고 술도 줄었다. 매일 같이 운동도 꾸준히 하고 술에 취해 난폭하게 변하거나 기억을 잃는 일은 없어졌다.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최악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일은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가봐야겠다.                               



산책을 하면 생각 정리가 쉬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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