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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솜 May 27. 2024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란 곳

주공아파트

한 엄마가 아이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간다.   

   

지방에서는 이 모습을 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도시가 활기차려면 젊은 사람들이 많아야 하고 아이들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젊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집과 직장과 아이 키울 수 있는 교육시설인데 직장을 찾아 젊은이들이 도시로 가니 지방은 집과 학교가 비어 간다.      


직장을 찾아 수도권으로 가는 청년들도 편하게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도시는 아파트와 빌딩으로 화려하다. 그러나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은 줄어들고 있다. 집이 없어 결혼도 할 수 없고 아이도 키울 수 없는 젊은 사람들, 일자리가 없어 도시로 떠나는 젊은이를 잡을 수 없는 지방도시. 엇박자가 출산율 저하의 원인이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깝다.     

 



나는 마산에서 아이들을 낳았다. 큰 애가 태어난 날 그 병원에서 태어난 아기가 17명이었다. 그날만 특별히 출생아가 많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출생현황과 비교하면 대단한 숫자다. 예방주사가 예약된 날은 교실보다 큰 강당에서 아기를 데리고 온 많은 엄마들과 함께 기다리던 생각이 난다.      


우리 가족의 첫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주공아파트였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키웠다. 한 층에 1호, 2호가 마주 보고 10호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건물 몇십 동이 있는 대단위 아파트였다. 우리 집은 방이 3개 거실과 주방 화장실 다용도실로 구성된 18평형이다. 동에 따라 14평형, 16평이 있었기 때문에 18평형은 동네에서 가장 넓었다. 난방은 연탄보일러였다. 연탄보일러는 연탄을 쌓아 놓는 공간이 있어야 하고, 시간 맞춰 갈고, 연탄재를 버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지금도 연탄을 배달해 주던 부부가 생각난다. 일하는 동안 봐줄 사람이 없었는지 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부부는 연탄을 지고 계단을 올랐다.  그동안 아이는 우리 아이들과 놀았다. 


가장 힘든 것은 한 겨울, 명절이나 행사가 있어 수원 시댁에 갔다 오면 집은 냉골이었다. 이불이라는 이불은 모두 꺼내 방바닥에 깔고 아이들을 누였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번개탄에 불을 지피는 일이다. 연탄에 불이 붙어 방이 데워질 때까지는 하루정도가 걸렸다.  기름보일러로 교체하기 전까지 이러한 수고로움은 계속되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가 불편함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 간의 정이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오후 시간이면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모두가 나와 놀았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는 폭이 꽤 넓었다. 시멘트 바닥이었지만 공간이 넓어 마치 작은 운동장 같았다. 연령층이 다양해서 놀이기구 하나 없어도 늘 재미있었다. 엄마들이 업고 나오는 아이에서부터 초등학교 5, 6학년까지 다양하게 어울려 놀았다. 형제가 없는 아이도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동네 아이들에게 형 누나 하면서 따라다녔다.     


한 아이가 가진 세발자전거는 다른 아이의 부러움을 샀다. 자전거를 타겠다고 우는 아이에게 엄마들은 '이 자전거는 누구 것이다.' '네가 타려면 이야기를 하고 타야 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한번 타보자며 양보를 구했다. 아이들은 놀면서 소유에 대한 질서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법을 배웠다.  




계단 옆 1층집은 문이 항상 열려 있었다. 인심 좋은 윤경엄마는 언제라도 들어가면 커피를 타 주며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었다. 사람들은 오다가다 들려 현관에 걸터앉아 커피를 얻어 마셨다. 윤경이네 집이 가장 인기가 있는 날은 계단청소 날이다. 한 달 한 번 계단 물청소를 했다. 맨 위층에서부터 물을 뿌리며 닦아 내려왔다. 청소가 끝나면 윤경이네 모여 커피를 마셨다. 1층 윤경이네는 마치 마을 정자목과 같았다. 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목은 일하다 쉬기도 하고 오가는 사람들이 멈춰서 마을의 소식을 알 수 있는 만남의 장소였다.  윤경이네가 그랬다.       


마산에서의 생활은 일가친척은 물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향살이였다. 남편은 토요일은 물론 가끔은 일요일까지 회사에 나갔다. 지금 표현으로 단 한 시간도 아이를 맡길 수 없는 독박육아였다. 이웃은 큰 힘이 되었다. 소통할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지금은 민간 아파트로 재건축되어 그 시절의 5층 주공아파트는 없지만 함께했던 이웃들은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모두 그 지역을 떠났다. 그러나 그 정은 오래갔다. 아이들이 커서 결혼할 때 수원에서 마산까지 오가며 서로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가고파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마산 출생의 노산 이은상의 시다.




마산은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 아니다. 

10년 가까이 살았던 곳이다.

아이들 키울 때를 기억하면 그곳의 바다와 이웃이 생각난다.

마산은 또 하나 내 기억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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