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양옥
이곳은 나의 시댁이다. 결혼 후 1년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동생들도 결혼 후 1년은 시부모를 모셨으니 가풍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0년을 남편 직장이 있는 지방에 살다 다시 돌아온 것은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이었다. 큰아이가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 7년 정도 살았던 집이다.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시간이 8년이었지만 시댁이기 때문에 지방에 살 때도 명절이나 생일을 전후해서 아이들과 수시로 와서 생활했으니 부모님이 아파트로 이사 가시기 전까지 거의 20년을 함께 지냈던 집이다.
2층 양옥집이다. 반지하와 1층 2층 박공지붕의 다락방이 있어 실제로는 네 개의 층이 존재한다. 지하실은 주로 저장공간이었고 다락방은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박공지붕의 멋을 위해 경사가 급해서 허리 펼 수 없는 공간이 많아 사용하기는 불가능했다. 재개발이 결정되어 철거되는 집들을 보면 거의 이런 형태의 집이다. 8~90년대 도시에 지어진 단독주택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라 할 수 있다.
초창기 양옥은 거실을 중심으로 빙 둘러 현관 안방 화장실 주방 건넌방이 위치한 1층 건물이었다. 외관은 붉은 벽돌 벽에 평지붕이 일반적이었다. 옥상은 빨래를 널고 고추를 말리고 화분에 식물을 심어 도시 생활에서 마당을 대신하는 공간이었다. 시부모님은 처음 사셨던 주택은 이렇게 기본적이고 간단한 1층 양옥이었다고 한다.
경제가 발전하고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전통적으로 부모를 모시는 것이 미덕이었고 형제도 많던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양식의 거주공간은 불편했을 것이다. 이 시대 집들은 점점 규모가 커지고 확장되는 경향을 보였다. 시댁은 80년 초 2층을 올리셨다고 한다. 2층에 방이 두 개와 거실이 있고 앞에 테라스가 꽤 넓었다. 1층 역시 뒤쪽으로 방과 부엌을 만들어 공간을 늘렸다.
박공지붕을 만들면서 집은 거의 3층집이 되었다. 외관이 멋있었다. 정원도 넓었다. 대문에서 들어오면 현관까지 바닥은 블록이 깔려있었고 시렁을 역어 포도나무 덩굴이 해를 가렸다. 양옆으로 갖가지 나무가 많았다. 특히 마당 가운데 자목련은 봄이면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펴서 동네 사람들도 좋아했다. 마당에는 개를 키웠다. 보통은 2마리였지만 많을 때는 다섯 마리인 적도 있었다.
이곳에서 시부모님 우리 부부와 아이들, 3대가 살았다. 결혼한 다섯 형제의 가족들도 와서 주말을 보냈다. 식구가 많으니 명절 생일 돌 김장 등 행사도 많았다.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 하니 기존의 주방으로는 공간이 부족했다. 건물 뒤편으로 공간을 확장하여 주방 식당 거실의 기능으로 사용하고 기존의 주방은 시아버님의 개인공간으로 사용하셨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집은 크고 아이들 돌보고 시부모님 식사 준비로 일이 너무 많았다. 집 자체가 전체 공간을 종합적으로 설계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확장하여 동선에 있어 불편한 점이 많았다. 3층을 오르내리고 부엌과 세탁실 난방을 위한 보일러실 등 동선의 불편이 주부 일의 양을 많게 했다. 이러한 집 구조는 사람들이 아파트를 선호하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아파트는 건축의 어떠한 기능보다 공간의 편리함을 우선으로 지어진 집이다. 주부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3세대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층이 분리되고 주방이 넓어 가능했다. 보일러실 창고 마당 등 여유공간이 충분했다. 봄이면 꽃 피고 가을에는 단풍 들고 겨울이면 흰 눈에 덮인 정원이 아름다웠다.
주부인 나는 힘들었지만 아이들은 잘 자랐다. 어디든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마당 위아래층 지하실 다락방까지 뛰어다녔다. 어느 구석에서 TV를 보는지 책을 읽는지는 알 수도 없었다. 내가 너무 바빴으니까. 주말이면 사촌들이 오니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도 많았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고 사촌들이 영어캠프 어학연수 간다는 소리를 들으면 애들을 이렇게 키워도 되나 생각하기도 했다.
가옥구조는 시대와 문화를 반영한다.
우리가 양옥이라고 불리는 주거 양식은 실제 서양 사람들이 사는 주거 양식은 아니다. 한옥과 다르다는 뜻으로 양식이라 불린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주거란 자연과 경제 사회 문화를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지역의 특성에 맞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근대 개화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사람들은 자신들이 도면을 갖고 들어와 정말 서양식 주택을 지은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나라 한옥을 개조해서 자신들에게 편리하게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일본식 적산가옥도 우리나라 주택에 영향을 주었던 가옥이다. 우리가 살았던 2층 양옥은 한옥과 서양식 가옥 일본 가옥 등의 영향을 받아 우리 실정에 맞게 편리하게 정착한 우리의 가옥이다.
지금도 어느 곳이든 내가 살았던 2층 양옥집을 볼 수 있다. 우리는 3세대가 살았지만 층이 분리되어 세를 주는 경우가 많았다. 입구를 분리하기 위해 밖으로 계단을 낸 경우도 많다. 2층을 올리지 않은 집도 마을의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억하라 1988’을 보면 그 시절을 보는 거 같다.
신도시 개발이나 도시 재개발과 같은 이름으로 철거되는 가옥들을 보라. 대부분 내가 한때 살았던 2층 양옥이다. 신도시에는 이러한 가옥을 모두 철거하고 아파트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