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간에서 인심난다?!

by 밑줄긋는여자

친구들을 만나기위해 집을 나선 날이었다.

만날 약속시간까지 남은 시간이 촉박해서 버스가 오자 서둘러 버스 앞문쪽으로 향했다. 내 앞에는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께서 힘겹게 버스 계단을 오르고 계셨다.


"미승인 카드입니다"


할아버지께서 내신 카드가 승인되지 않았다는 음성과 함께 곧이어 운전기사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얼른 내려요!"


할아버지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셨는지 그대로 자리를 찾아 앉으셨다. 승차를 기다리던 승객들이 모두 탑승했지만 버스는 출발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빨리 내리라구요!!"


기사님은 버스를 출발시키는 대신 계속 내리라며 소리를 질렀다. 카드가 사용할 수 없으니 다른 카드가 있냐던가 현금을 내시라고 좋게 설명할 수도 있을텐데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그것도 몸이 불편한 어르신께 소리지르는 기사분의 모습이 좋아보이지 않았음은 당연했다. 다른 승객들도 뭘 내리라고까지 하냐며 수근거렸다.


할아버지는 기사님의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으신 듯 자리에 앉아계셨고 나는 지갑을 열어 돈을 찾았다. 내가 그냥 대신 내드리고자함이었다. 기본요금은 1300원인데 천원밖에 잔돈이 없어 고민하고 있는데 다시 한 번 기사님이 할아버지께 내리라고 소리를 질렀고 그제야 알아들으신 듯 할아버지께서 기사님 있는 곳으로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셨다.


"내려요 얼른!"

"내리라구? 왜?"

"돈 안냈잖아요!!"


할아버지는 다시 카드를 단말기에 댔지만 미승인카드라는 음성만 흘러나왔다.


"내려요 빨리!!"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천원을 꺼내 요금함에 넣었다.


"천원 더 내요! 기본요금 천 삼백원이에요!"


할아버지는 천원을 더 넣으셨고 거스름돈 700원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버스는 출발했다. 불편한 몸으로 몸을 숙여 동전을 줍는 할아버지와 기사님을 흉보는 승객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마음이 불편해왔다.


'폴레트의 수상한 베이커리'에서 폴레트는 지독한 인종혐오주의자다. 흑인인 사위에게는 사람취급도 하지 않고 손자에게까지 흑인이란 이유로 차갑게 대한다. 뿐만 아니라 폴레트는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앞집 남자에게도 퉁명스럽고 까칠하다. 겉으로 보기엔 '고집 쎈 편견쟁이 할망구'라는 말이 어울릴 법 하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자신의 망한 식당을 중국인들이 인수했고 기초연금을 받으며 차압까지 당해 거리의 쓰레기장을 돌아다닌다는 사실과 만나게 된다. 그녀의 행동이 옳다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과 마음의 여유가 생길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면 그 분노의 응어리가 외부를 향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폴레트 역시 자신의 일자리를 중국인과 아랍, 흑인들에게 빼앗겼다 생각했기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당장 내일의 끼니걱정을 해야하는 처지에 이웃에게 친절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도 처음엔 다른 승객들처럼 기사분의 행동을 비판했지만 어쩌면 기사님께도 사정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기사님도 처음부터 불친절하진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의로 어르신들을 그냥 태워주기 시작하자 그걸 악용하는 사람들이 계속 생겨난 건지도 모른다. 부족한 운임을 자신의 주머니에서 메꿔야했을 지도 모른다.


물론 직업의식이 확실히 없으신 행동이었고 똑같은 상황이라도 웃으며 친절하게 대하시는 기사님들도 많기에 그분의 행동이 모두 정당화될 순 없을거다.


다만 기본적인 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타인에게 친절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대학친구들 중 다섯명이서 자주 붙어다니며 생활했었다.

그런데 그 날 약속에 나온 건 나를 포함해 세 명 뿐이었다. 한 명은 나보다 두 살 많은 비서로 일하는 미혼 직장인 언니이었고 한 명은 구청에서 일하는 공무원, 그리고 나였다. 나오지 않은 친구 중 한 명은 아직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머지 한 명도 공무원시험을 오랫동안 준비하다 합격하지 못하고 보육교사 자격증을 따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 중 보육교사를 하려는 친구는 비서를 하는 언니가 집에서 그녀가 취미생활로 하고 있는 손바느질을 살려 용돈벌이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조언에 불같이 화를 냈단다.


"내가 싫다는데 왜 자꾸 얘기해. 그리고 지금 누굴 참견해? 언니 결혼했어? 집 살 돈 모았어? 낼모레면 폐경이야."

결국 비서언니는 본인 생일에 뷔페에서 친구와 큰소리로 다투고 말았단다.


자신의 상황이 힘겹거나 여유가 없을 때 외부에 적대적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보육교사를 준비하는 그 친구도 아마 그랬을 거다. 충분히 자신도 고민하고 힘든데 다른 이의 조언은 무시 혹은 쓸데없는 참견정도로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폴레트의 수상한 베이커리'에서 폴레트는 힘겨운 생활에 돈을 벌어보고자 마약(대마)을 판매하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판매는 잘 되가고 폴레트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마약을 넣은 빵을 만들어 그 업계(?)에서 유명세를 떨친다. 생활이 윤택해지자 그녀는 변화한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생기고 흑인이라 미워하던 손자를 데리고 바닷가로 여행도 가게 된다. 앞집 남자와도 소통하고 표정은 이전보다 온화해진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도 취준생 시절엔 무척 까칠했다. 면접에서 계속 떨어지고 밤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울기도 했다. 엄마가 무슨 얘기만하면 톡톡 쏘아댔다. 당연히 외부와의 접촉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취직이 되자 친구들과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경제적 여유와 함께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집에서도 착한 딸로 돌아갔다.


최근 버스파업의 이슈도 기본적인 생존과 윤택함을 위해 생긴 일일거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라는 옛말이 씁쓸하게 떠오르는 날,

모두가 기본적인 생활의 윤택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의 온화함이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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