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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박가 Sep 25. 2024

나의 보리똥 나무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먹을거리가 풍성했다. 용진에서 신촌을 가는 지름길인 ‘작은길’에는 오디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 우리는 이 나무 열매를 ‘오돌개’라고 부르며 옷과 손이 물드는 건 괘념치 않고 열심히 따 먹었다.  그러면 어느새 입술이 보라색으로 변해있었다.


  꺼꺼 아저씨네 집옆 산길 초입에는 산딸기와 찔레가 많았다. 산딸기는 산으로 들어갈수록 빨갛고 싱싱했다. 길가 옆은 거무튀튀하게 탄 게 많았다. 그래서 좀 더 깊숙한 곳에서 따먹곤 했다. 찔레는 연한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겨 먹었다. 똑똑 끊기는 쌉싸래한 찔레 줄기는 입을 심심하지 않게 해 주었다.


  산길을 가다가 으름을 따먹기도 했다. 으름은 껍질이 벌어진 걸 따면 얼추 알맞게 익어있었다. 초록색이거나 딱딱한 으름은 떫어서 먹을 수 없었다. 촘촘히 박힌 으름 씨가 아무리 많아도 발라내지 않고 그냥 다 삼켜 버렸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보리똥’ 열매였다. 신촌을 지나 반고개째를 오르는 길목 왼편에 보리똥 나무들이 즐비했다. 가지마다 팥알처럼 작은 열매를 다닥다닥 달고 있었다. 야트막한 산 아래라 손을 뻗어 가지를 훑어서 열매를 따먹고는 했다.


  나는 이 보리똥 열매 맛이 너무나 좋았다. 원체 작아서 배를 채워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입안에서 맴도는 달콤하면서도 신맛이 좋았다. 이 보리똥 열매를 따먹는 계절이 오면 반고개째로 향하는 길이 절로 신났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초등학교와 다른 길로 등교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보리똥을 더 이상 먹지 못하게 되었다. 한 번씩 보리똥이 생각났지만 일부러 찾아가서 먹지는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신촌에서 우리 동네까지 아스팔트 도로이차선으로 깔렸다. 아스팔트를 깔면서 반고개째 고개를 깎아 완만한 도로를 만들었다. 깎인 언저리의 보리똥 나무들이 무사할지 걱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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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문득 보리똥이 생각날 때가 있었다. 주변을 찾아봐도 보리똥 나무는 발견할 수 없었다. 시장에서도 보리똥 열매를 볼 수 없었다. 이름이 잘못됐나 싶어 '보리통'으로 찾으면 보리수 열매가 나왔다. 그러나 우리가 먹던 ‘보리똥’ 열매는 보리수보다 훨씬 작았다. 보리똥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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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추석명절에 친정인 목소리에 갔다. 용진 초등학교에서 용진 분교로 바뀌고 폐교가 된  내 모교가 불현듯 생각났다. 저녁을 먹기 전 그곳으로 향했다. 차로 오 분이면 되는 거리를  시간씩 걸어 다녔었다니. 철문이 굳게 닫힌 학교는 그네와 몇몇 놀이기구 위치가 바뀐 것 빼고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책 읽는 소녀 동상도, 등나무 아래 의자들도 그대로였다.

  

  '뺑뺑이'를 돌리며 아슬하게 매달리다 결국에는  발씩 올라탔 그때가 눈앞에 그려졌다. 줄 서서 타던 그네도, 손에서 쇠냄새가 나던 철봉도 눈에 선했다. 학교를 더 둘러보다가 저녁시간이 다가와 집으로 향했다. 신촌을 지나고 반고개째에 오르기 전 갑자기 보리똥이 혹시나 남아있지는 않을까 확인하고 싶어졌다.


  차에서 내려 고개 왼편 야산을 올려다보았다. 나무들이 많았지만 보리똥 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위치를 잘못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계속 나무들 사이를 살펴보며 길을 따라 올라갔다. 그러나 보리똥 나무는 눈에 띄지 않았다. 터덜터덜 더 올라가 보아도 보리똥 나무를 찾을 수 없었다. 아스팔트 도로와 함께 보리똥 나무는 사라졌나 보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가위에 무려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이어질 줄 몰랐는데 그래도 하늘은 높기만 했다. 더워도 가을은 가을인가 보았다. 차에 타러 가면서 아쉬운 마음을 거둘 수 없어 다시 산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보리똥 나무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너무 늦게 와버렸다. 그전에 찾아올 수 있는 시간은 충분히 많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보리똥과 함께 내 통학길의 추억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다시는 나의 보리똥 나무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을 하늘은 너무도 맑았다. 하늘을  배경 삼아 나뭇잎들이 예쁜 테두리를 뽐내고 있었다. 유난히 반짝거리는 나뭇잎에 눈이 갔다. 보리똥! 보리똥 나무였다. 보리똥 나무가 있었다. 잎만 보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아직 보리똥 나무는 거기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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