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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박가 Oct 02. 2024

민들레컵

  내가 여덟 살이었을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학교가 싫었다. 등굣길도 힘들고 선생님도 무서웠다. 받아쓰기도 버거웠다. 비 오는 날이면 유독 코피가 많이 나기도 하였다.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는 그럭저럭 학교에 다닐만했다. 아이들과도 잘 지냈고 제법 학교생활도 잘해나갔다.  


  내가 열 살이었을 때 나는 학교가 꽤 재미있었다. 내 주변에 좋아하는 친구도 많았고, 선생님도 나를 예뻐해 주신다고 느꼈다.   


  내가 열한 살이었을 때 단짝 친구가 대전으로 전학을 갔다. 나는 슬펐지만 다른 단짝이 생겨 곧 즐겁게 잘 지냈다.  


  내가 열두 살이었을 때  나는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학교가 즐거웠다.


   그 무렵 학교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과 우르르 윤옥이네 집으로 놀러 갔다. 윤옥이는 교문 바로 맞은편,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집에 살았다. 우리 반은 열여섯 명 남짓했는데 육 년 내내 같은 반이다 보니 서로 속속들이 잘 알았고 두루두루 친할 수밖에 없었다. 윤옥이도 그런 아이 중 하나였다.


  윤옥이네 어머니는 우리 선생님과 동창이라고 했다. 내가 선생님을 우러러보며 먼 동경의 대상으로 느끼던 때였다. 그런데 내 친구 어머니가 선생님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이질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윤옥이네 집에 놀러 갔다. 윤옥이네 마당에는 도자기 컵이 가득했다. 멀쩡한 것부터 깨진 것,  삐뚤빼뚤한 것까지 잔뜩 펼쳐져 있었다. 저런 도자기 컵은 시장에서 사는 것인 줄 알았는데 윤옥이 아버지가 도자기 가마에서 구워오신 거라고 했다.


  나는 생경하기도 하고 도자기의 촉감이 좋아서 친구들과  한참을  만지며 구경했다. 나도 저런 컵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에는 근사한 건 고사하고 멀쩡한 컵 하나도 없었다. 윤옥이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우리에게 하나씩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며 신중하게 나의 컵을 골랐다.  


  컵은 옥색과 회색의  중간쯤 되는 바탕에 민들레가 그려져 있었다. 지름이 넓어서 물컵보다는 다른 용도가 좋을 것 같았다. 집까지 험한 길을 조심해 가며 컵을 들고 왔다. 고심한 끝에 그 컵을 연필꽂이로 쓰기로 했다. 그날부터 민들레컵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연필꽂이가 되어 주었다. 윤옥이는 6학년 때 전학을 갔고 그 이후로 우리는 따로 연락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자취 생활로 여섯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도 그 연필꽂이는 내 곁에 살아있었다. 그동안 깨 먹은 수많은 접시와 컵들을 생각하면 그저 놀랍다. 뽐내지 않은 채로 연필꽂이는 자기의 자리를 지켰다.   


   내가 사십 대 중반이 되었을 때 민들레 컵은 내 물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되었다.  그동안 소중하게 대하거나 크게 아끼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민들레컵은 깨지지 않고 온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 역시 민들레컵처럼 살아가고 싶다. 비록 눈에 띄지 않을지라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오롯이 지키는 존재로 말이다.

※ '윤옥'이는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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