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 제아무리 몰아쳐도, 결국 다정함이 이긴다.
내가 태어나 뱉은 첫 말, '엄마'는 큰 이모에게 향했다. 당시 갓난쟁이인 나를 돌봐주셨던 분이다.
한 살 배기의 외침은 길게 이어져, 멀리 수화기 너머에 있는 진짜 엄마의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가족들 중 제일 작은 사람이었지만, 스물여섯의 엄마에게 누구보다 큰 슬픔을 줄 수 있었다. 엄마는 나를 낳고서부터 많이 아팠기에, 나를 큰 이모에게 꽤 오랜 시간 맡겨야 했다. 나는 이모와 이모부를 엄마와 아빠로 생각한 아기였다. 보통 말이 빠른 아기들은 어른들에게 기쁨을 준다는데... 말을 빠르게 텄던 나, 그리고 나의 첫 '어마'는 누구도 온전히 기쁘게 해주지 못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엄마의 고향에서 자라고 있었다. 당시 엄마는 자신의 고향에서 차로 5시간도 넘게 걸리는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입이 트여 신난 나는 줄기차게 엄마를 불러댔고, 이모는 이 순간을 바로 엄마에게 전하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수화기 너머로 “어마, 마마, 맘마” 아주 다양하게도 터진 입을 오물거리며 '엄마'를 찾는, 혹은 '진짜 엄마'는 기억도 못할 그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엄마는 눈물이 펑펑 쏟아져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하던 엄마는 그때 나까지 돌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을 버리고, 도저히 나를 떼놓을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동생은 어디 있어? 언제 와? 왜 안 와?’ 매일 같이 쏟아지는 엄마 가까이에 있던 4살 배기 언니의 질문 세례로 엄마는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던 차였다. 엄마는 그때 ‘세상 모든 엄마는 죄인’이라는 말이 가슴에 쿡 박혔다고 한다. 내 생애 첫 한 마디, ‘엄마’는 전화기 너머로 멀리 건너가, 아픈 엄마의 마음을 헤집었다. 기쁜 만큼 아린 소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로도 나는 계속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래서 내 어릴 적 앨범에는 100일, 돌잔치 사진을 제외하고는 영아 시절 사진이 별로 없다. 내 어릴 적 사진은 4~5살쯤부터 일까? 그때부터 존재한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 엄마는 계속 아팠다. 많이 아팠다.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기도 했고, 입원해 있지 않을 때도 워낙 병원을 자주 오가기 때문에 몹시 바빴다. 난 병원이라는 곳이 뭐 하는 곳인지도 자세히 알기도 전에 그곳을 아주 싫어했다. 병원은 단순히 어린 내게서 엄마를 앗아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그렇게나 잦은 통원 치료를 줄이는 경우에는 고향으로 요양을 가있었다. 나는 여러 품을 옮겨 다니면서 단어를 배웠다.
먼 고향 친척들의 집, 다시 서울의 여러 동네. 육아 난이도가 꽤 높은 아기를, 감사하게도 흔쾌히 맡아주던 어른들. 그때의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5살 때까지, 이전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때 8살이던 언니는 엄마, 아빠와 함께했던 날들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항상 어릴 때 기억이 텅 비어 있었다. 우리의 얘기지만, 마치 남의 얘기를 듣는 듯이 들을 때도 있었다. 때론 불과 며칠 전의 일도 그랬다. 그럴 때 나는 그냥 웃었다. 기억이 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편이 좋았다. 나는 내가 기억이 안 난다는 사실을 알리기보다는, 누군가 나로 인해 추억을 회상하는 데에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이 더 불편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조차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 편치 않은 상황들은 아주 오래도록 나를 상냥하게 길들였다.
나는 엄마 앞에서 사춘기가 없었다.
엄마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되는 사람인 걸 암묵적으로 알았나 보다. 엄마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바로 아팠고, 아프면 나를 떠났다. 천방지축 아이일 때도, 꼴통 소리를 매일같이 듣던 학창 시절에도 엄마 앞에선 그저 온순한 양이었다. 돌이켜보면 아주 어렸던 나는 항상 헤실헤실 웃으면서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던 것 같다. 미운 병원, 처음 보는 어른들, 다시 만난 낯선 친언니, 그리웠지만 또 헤어질까 봐 미리 두려운 엄마, 아빠… 몇몇 어른들이 볼을 때리며 “울어! 울어봐!”했을 만큼 얌전했던 떠돌이 아기는, 이번엔 어디로 갈까 긴장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이번엔 저를 울어보라며 못살게 구는 어른의 집으로 가야 할 수도 있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용히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진도 남지 않을 만큼 떠돌아다녔던 갓난아기는 다양한 가족 형태를 가진 다정 한 어른들의 관심과 애정을 먹고 자라, 걷고 뛸 즈음에는 항상 개구쟁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밝고, 건강하고, 사랑스럽다. 나는 나를 돌보아준 어른들의 다정함에 깊이 감사한다.
이제는 백발이 성성해진 나의 첫 ‘어마’, 나의 큰 이모는 아직도 나를 아기처럼 따뜻하게 보아주신다.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도, 누군지 잘 알지 못하는 친척 어른들의 댁에 방문할 때마다 그분들은 어제처럼 선명하게 내 아기 때의 모습을 기억해 준다. 300km의 거리, 자주 뵙지 못하는 어른들의 기억 속에 나는 언제까지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함께 한 시간은 길지 않지만, 그분들이 간직해 주실 나의 어린 시절은 영원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내 100일, 돌잔치 사진을 보면 나는 엄마와 아빠만이 아닌, 나를 키워주셨던 많은 부모님들이 안고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 많은 친척 어른들 말이다. 그 연령대의 아기들은 엄마나 아빠에게서 벗어나지 않거나 모르는 어른들로 북적이면 무서워하는 경우도 많다던데, 나는 여러 어른들의 품에 아주 잘도 안겨있다. 복도 많지, 아마 나는 외할머니 한복 깊숙이 숨겨진 쌈짓돈도 최고로 많이 받는 아이였을 거다.
누군가 보기에 나의 첫 번째 불행은 0세 시절부터 시작된 떠돌이 생활이었겠지만 수많은 식구들의 따스한 품에 안겨, 다양한 형태의 다정함을 배울 수 있었던 나만의 재산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