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더 오래 일하는 이유
한국에서 법정근로시간이 주 52시간으로 정해져 시행된 지 몇 개월, 잘 적용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카톡방에서 나누는 사람들의 대화들을 보고 있자면 여전히 야근과 주말 근무를 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연장근로가 최대 12시간이라지만 적용되는 곳은 한정적인가 보다. 법이 개정됐다지만 사실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영국의 법정 근로시간은 40시간이다 (최근에는 이것도 길다는 여론이 많다). 업무상 필요할 경우 오버타임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길지 않다. 때문에 오버타임 수당을 매니저 허락하에 올릴 수는 있으나, 대부분은 그냥 올리지 않는다. 사실 오버타임을 자주 할 정도로 업무가 과도해지면 사람을 더 뽑는다. 따라서 대부분은 40시간을 칼같이 지킬 수 있다. 남편 같은 경우엔 40시간도 flexible time이 적용돼서 월화수목 9시간 일하고 금요일은 오전 근무만 한다. 나의 경우는 flexible time이 아니지만 주 36.5시간 근무이다 (물론 업종마다 차이는 있다, 컨설팅 같은 곳은 야근이 잦다고 한다). 업무시간이 한국에 비해서 확 줄어서 3-4시면 퇴근을 하다 보니 마치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일이 빵꾸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들이 효율적이거나 더 창의적으로 일을 더 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왜 한국인들의 근무시간은 OECD 1-2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시장의 크기?/
한국이 선도하고 있는 업의 경우 시장이 전 세계이니 크게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선진국의 기술에 치이고 중국과 인도의 저렴한 인건비를 바탕으로 한 공격에 치여 끼이는 것이 다반사다. 영국의 경우 시장이 원체 크다. 과거 식민지 국가들을 commonwealth라고 묶어서 현재는 영국 여왕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무슨 동맹체처럼 있는데, (개인적으론 브렉시트 후에도 장기적으론 크게 지장이 없을 것 같아 보인다) commonwealth 국가들이 53개국이니 영국의 시장은 유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공격적으로 뭘 하지 않는다, 어차피 잘 깔아진 판이니 그 위에서 그냥 하면 된다. 환경이 이렇다 보니 경쟁이 덜 한 느낌이다. 그래서 회사가 직원을 덜 쪼는 느낌이다.
한 예로, 아부다비에 지냈을 때 영국 마트, 상점들이 많이 있어서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가 했는데, 알고 봤더니 1971년까지 UAE가 영국의 보호국이었다고 한다. 그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UAE의 중요한 계약 관련 일, 컨설팅도 영국 회사가 도맡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commonwealth가 아닌 과거 보호국인데도 영향력이 이 정도니, 아직도 영국은 과거 대영제국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듯하다.
/ 보고체계와 수직 문화?/
한국에서도 직급을 수평화하고 보고 체계를 간결하게 한다고 여러 회사에서 시도 중인 것으로 안다. 전 직장도 최근에 직급을 수평화했다 하는데 뒷얘길 들어보니 연봉을 수평화 시켜서 직원들 월급 인상을 줄이려는 노림수라는 말들이 많았다. 어쨌든 한국은 꼼꼼하고 예쁘게 꾸며진 보고를 상위 직급까지 단계별로 해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은 보고 체계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 그냥 지나가다 만나서 얘기해도 그만이다. 나이도 상관없이 그냥 다 동료다 보니 가서 필요한 말을 하면 된다. 굳이 형식적인 메일이나 문서로 칸 맞추고 줄 간격 맞추는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 매니저가 있어도 언어 표현에 윗사람에 대한 구분이 딱히 없으니 확실히 말하거나 글 쓸 때 부담 없이 편하다. 이건 오랜 시간 누적된 이들의 문화적이고, 언어적인 특성이고, 나라의 고유 특징이기 때문에, 한국 회사에서 단순히 외국을 따라 한다고 직급을 수평화한다거나 호칭을 ~님,~씨로 부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다. 하는 일들은 한국과 정말 비슷하고 어느 정해진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실 특별한 것 없이 너무 비슷해서 놀랄 지경이다 (오히려 개개인의 능력만 보자면 한국사람들이 훨씬 낫다고 생각할 때도...). 대신 간결한 보고와 절차들 덕분에 일이 많이 줄어든다. 사무실이 항상 말소리로 시끌시끌하다. 물론, 말로 전했다가 까먹어서 놓치는 부분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기계가 아닌 사람들이 하는 일이니, 다시 보완하고, 고치면 된다. 그런 식으로 자기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가면서 일을 굴러가게 한다.
/일이 삶의 전부가 아니다/
직업에 엄청난 소명의식이 있는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어쨌든 보통 사람이 일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생계다. 즉 나와 가족의 생활 그리고 삶을 위해 일을 한다. 그 과정에서 일이 재미있으면 더 좋은 것이다. 회사도 직원은 직원이지 오너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는 분위기? (회사의 주인이 나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라는 이상한 소리는 못 들어봤다) 그러다 보니 다들 자기 권리인 퇴근과 연휴는 칼같이 따른다.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법정 연차는 25개 정도이고 법정 공휴일이 8개, 거기에 다음 해 연차를 일부 끌어오거나 추가로 구입해서, 일 년 중 주말을 제외하고 약 40일 정도의 연휴를 즐긴다. 그러다 보니 길게 여행을 다닐 수 있다 (참고로, 병가는 별개다). 일이 삶의 일부이긴 하지만 메인은 아니기 때문에, 잘 쉬고, 여가 생활하고, 가족과 추억을 만드는 것이 이들에게 중요해 보인다. 아직도 약간은 적응이 안 되지만, 나도 남편도 인식이 조금씩 바뀌는 중이다.
우리 모두 워라밸을 꿈꾸지만, 지금 한국은 과연 그런 조건, 문화, 환경이 주어졌는가에 의문이 든다. 법은 개정하면 되지만 다른 것들은 오랜 시간 뿌리내려야 한다.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경제적, 역사적 상황도 너무나 다르다. 한편으론 '강대국들 사이에서 끼어서 경쟁적으로 쉬지 않고 힘들게 달려온 것, 그 어느 민족보다 열심히 사는 것이 어떻게 보면 지금 한국의 경쟁력인데, 이들과 같아지려 한다면 그 경쟁력 유지될 수 있을까? 결국 한국 근로자의 숙명인 것인가...?' 생각도 든다. 출퇴근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다 끄적이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