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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 Nov 20. 2020

살고 싶지 않아 면접을 봤다 (1)

L 사이즈 정장, 반창고를 붙인 검정 힐, 너덜너덜해진 A4 용지들.

이력서를 쓴다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나의 부족함은 눈 감고도 훤히 꿰고 있지만, 나의 충분함을 쓰라고 하니 도무지 쓸 게 없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의 눈으로 나의 못난 점만 찾아 헤매는 게 말 그대로 못난 취미 같던 사람이 부득불 있지도 않은 잘난 점을 쓰려니 고역이었다. 괜히 자기소개서, 즉 자소서를 '자소설'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나는 몸을 배배 꼬며 '이러이러한 것을 잘한다 내용이나 '이러이러한 것만큼은 자신 있다 내용을 꾸역꾸역 채워나갔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내재한 양심과 낮디낮은 자존감만이 수치를 부르짖었을 뿐, 내 가증스러운 문장력은 뻔뻔하게 발동되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수치로 점철된 이력서가 낯빛을 바꿀 줄 몰라 투명했는지, 이력서는 줄줄이 반려당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다만 면접쯤에나 가야 불합격이니 합격이니 하는 결과지를 받아들 수 있고, 서류에서는 '불합격'이라는 단어조차 보기 힘들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았다. 딱히 합불을 알려 주지도 않고, 그냥 발표한다던 날 아무 소식이 없으면 그게 곧 불합격이었다.


뻔히 쓸 줄 알아서 그토록 미루고 미루며 안 삼키려 했던 건데, 결국 쓰디쓴 실패를 연속해서 들이키고 나니 뒷맛이 영 불쾌했다. 슬슬 오기가 생겼다. 하지만 오기만으로 승률을 높일 수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기에, 내 오기는 다소 얍삽하고 졸렬한 방향으로 표출되었다.


하나는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회사까지 모조리 서류를 넣는 것이었다. 나는 이전 한 스타트업에서의 인턴 생활에서 크게 데어 직원 수 10명 이하의 사업장에서는 절대로 근무하지 않겠다는 혼자만의 룰을 마음속에 세워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 룰을 깨고 직원이 서넛뿐인 회사에까지 마구잡이로 서류를 던졌다.


둘은 구인구직 사이트에 다시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는 것이었다. 아르바이트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리면 90%는 키스방이나 토킹 바 같은 곳에서 연락이 왔는데(무조건 그때그때 신고해야 한다. 나는 귀찮기도 하고 뭣도 모를 때여서 그냥 방치했지만.), 구인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리면 90%가 스마트 어쩌고 교육원이나 다단계가 의심스러운 영업직에서 연락이 왔다. 그 문자들도 차림새만큼은 어쨌든 멀쩡한 구인처처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순진하게 모든 문자를 꼼꼼히 읽어 보곤 했다. 하지만 그 문자들에도 이골이 날 무렵에는 [Web발신]을 달고 이미지가 첨부된 문자가 오면 자연스럽게 또 그것이려니, 하고 넘기는 지경이 됐다.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한 결과 역시 이전보다는 확실한 소득이 생겼다. 첫 번째로는 서류 통과 및 면접 안내 문자를 훨씬 자주 받게 되었고, 두 번째로는 쏟아지는 스팸성 영업 문자 틈틈이 실제 회사들의 면접 제의가 왔다.


첫 번째 방법으로 얻은 소득은 쉽게 포기했다. '합격'이라는 글자 좀 보고 싶어서 마구잡이로 들이부은 서류에서 원하던 결과를 받았으니 됐다 싶은 약은 마음이었다. 절반 이상은 쿨하게 보내줬고, 절반 정도는 고민하다 보내줬다. 배부른 짓이라면 배부른 짓이고, 눈이 높다면 높은 것이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소규모의 사업장은 자신이 없었다. 체계도 부족하고 사수도 없을지 모르는 환경에 처음을 내던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구인구직 사이트의 이력서를 보고 면접 제의가 들어오는 경우는 대부분 근무지가 광주였다. 나는 딱히 서울에서 일해야지! 수도권에서 살아야지! 이런 목표나 포부가 없었기 때문에 근무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실 아직 부모 품을 떠나기 두려웠고, 금전적으로도 혼자라는 짐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기에 되려 광주에 남고 싶었다. 하지만 제의를 받고 어떤 회사인지 검색해보면 어김없이 근무 인원이 너무 적거나 사람들이 최악이다, 최저시급과 다름없는 연봉을 주며 초과근무를 시킨다는 등의 악평이 자자했고, 그 점은 번번이 내 발목을 잡았다. 가끔 조급한 마음에 그냥 눈 딱 감고 갈까, 싶다가도 도무지 그런 곳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면접 제의를 거절하며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뭐라고 이래도 되나, 여길 거절했는데 여기보다 더 나은 데가 더는 없으면 어쩌나 싶다가도 연락 오는 회사의 요모조모를 찾아보고 실망하며 내가 고작 이 정도구나 하는 마음에 혼자 또 상처를 받았다. 아주 상반되는 두 마음이 동시에 널을 뛰었다.


나는 몰랐다. 우리가 한 번쯤 들어본 회사가 아니고서야 중소기업의 꽤 다수가 최저시급에 가까운 돈을 주면서 '보상 없는 초과근무, 당연한 야근, 식대 없음, 연차 눈치 보임' 등의 악조건까지 골고루 갖췄다는 것을. 누군가는 '네가 그 정도 수준이니까 그렇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말도 반쯤은 맞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이래도 오는 사람이 있으니 이런 조건에 사람을 구하겠지? 이게 요즘 나처럼 특출날 것 없는 취준생들의 현실인가 싶었고, 이런 현실에 쉽게 취업하지 못하는 것을 두고 그저 '요즘 애들'이 의지 없고 노력 없는 걸로 생각하는 몇몇 어른들을 생각하면 또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우리는 일을 하고 싶고 돈을 벌고 싶은 거지 바보가 되고 싶은 게 아닌데. 왜 우리를 바보로 알고 순순히 바보가 되어 젊음과 시간과 능력을 상납하길 바라는 걸까. 왜 우리는 이토록 무력하게 결국 이런 자리까지 고민해야 할까. 생각이 여기까지 깊어지고 짙어지면 순간순간 찾아오는 무력감이 또 나를 힘들게 하려 들었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무력감을 물리쳐가며 선택하고 선택받고, 버리고 버려지기를 반복하는 고된 과정 끝에 결국, 겨우, 드디어 면접을 하나 보게 되었다. 직원이 70명쯤 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한 지역 신문사였다. 신문방송학과 졸업한다고 다 기자 되는 것 아니라고, 치킨집 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라고 입이 아프도록 말하고 다녔는데 어쩌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 속 신문방송학과가 가진 고질적인 편견에 맞춰 신문사 면접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그때껏 서류 합격을 한 회사 중 가장 규모 있는 편이었고, 어디서 지나가듯 들어본 적이라도 있는 곳이었다. 면접을 가기로 결정하고 나자 심장이 아주 빠르게 뛰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나는 첫째였고, 잘 알고 지내는 선배나 언니 오빠도 딱히 없었으며,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흔히들 말하는 면접이란 걸 본 지 어언 20년도 더 된 분들이었다. 그 말인즉 내 면접 준비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면접의 내용을 준비하는 것은 차라리 수월했다. '직장'에 면접을 보러 가는 것이 처음이다뿐이지 나는 나름 숱한 면접 경험을 가지고는 있었다. 이제는 슬슬 기억나지 않을 둥 말 둥 하는 대학 입학 면접부터 온갖 동아리며 대외활동, 인턴 자리에서 본 면접들. 물론 진짜 사회에서의 면접에 비하면 '순한 맛'에 불과하겠지만, 그럭저럭 마음의 준비는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내가 쓰고 내가 낸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지만 몇십 번을 꼼꼼히 다시 읽고 달달 외웠다. 자기소개를 준비하고 예상 질문도 뽑아가며 혼자 시뮬레이션도 여러 번 했다.


더 큰 문제는 의외로 보여지는 것들이었다. 면접을 위한 번듯한 정장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었기에 먼저 부랴부랴 시에서 운영하는 면접 정장 대여를 알아보았고, 겨우 일정에 맞추어 대여 신청을 하는 데 성공했다. 머리는 어떻게 하지? 묶어야 하나? 묶기에는 그 모습이 좀 짧똥하고 풀기에는 약간 길게 느껴지는 애매한 길이의 머리를 하고 있었기에 고민 끝에 단정하게 드라이를 하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집에서.


후일 이 결정만큼은 아주 다행이었다고 여겼다. 모두 아주 전형적인 일명 '면접용 똥머리'를 한 데다 머리망까지 제대로 갖춘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묶기로 했다면 아마 포니테일을 하고 갔을 텐데, 면접 보기 전부터 평정심을 잃을 뻔했다. 물론 그 알량한 평정심은 면접장에 들어선 지 3분도 채 안 돼서 잃게 되었지만.




정장을 대여하는 곳까지는 우리 집에서 버스로 50분가량 걸렸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며 정류장까지 걷는 시간 등을 고려하면 이동하는 데만 두 시간도 족히 넘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로 없는 시간을 쪼개 겨우 평일 중에 방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난관은 또 있었다. S, M, L 사이즈밖에 없는 정장이 그것이었다. 남성 정장은 29부터 37까지 무려 아홉 사이즈가 있었지만 여성 정장은 오로지 세 사이즈가 다였다. (글을 쓰며 생각난 김에 오랜만에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XS와 XL이 새로 생겼다! 세상의 표준을 벗어난 이들에게 축하를.) 이놈의 세상에 뚱뚱한 여자가 설 자리는 이렇게 또 없구나. 태연한 척 옷걸이들을 뒤적거리며 나는 L 사이즈를 유심히 보았다. 들어갈까? 들어가겠지. 아냐, 모르겠어. 고민하고 있는데 직원이 그랬다. 입어보실 수 있어요. 머쓱하게 감사하다고 인사하고는 옷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가서도 한참 고민했다. 넣다가 터지면, 찢어지면 어떡하지?


다행히 L 사이즈는 내게 딱 보기 싫지 않을 정도로만 얼추 맞아 주었다. 치마가 다소 팽팽하게 허벅지에 달라붙었지만 이만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옷에서 한시름 놓자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굽 높은 신발이라고는 신어본 적도 없는 발에 꾸역꾸역 7cm 힐을 구겨 넣는 일도 버거웠다. 몇 걸음만 내딛어도 갓 태어난 망아지 새끼마냥 우스꽝스럽게 다리가 휘청였다. 이걸 신고 걸어서 면접장까지 들어갈 수는 있는 건지 걱정이 됐다. 결국 운동화를 챙기기로 했다. 들어가기 전에 갈아신고, 나오자마자 다시 갈아신자는 마음이었다. 딱 스무 걸음만 신고 걷자. 자빠지기야 하겠어.


이래저래 대여를 마치고 나니 다음 고민거리가 덮쳤다. 화장이었다. 아침 아홉 시 반 면접이라 드라이도 못 받는 마당에 면접 메이크업은 사치였다. 물론 일반적인 영업시간에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예약해 오픈 시간 전에 가서 받으려면 어딘가에선 받을 수야 있겠지만 내게는 그럴 돈이 없었다. 광활한 인터넷의 바다를 헤엄쳐 대충 이만하면 적절하겠다 싶은 메이크업을 찾아냈다. 원래도 친구들과 어울려 놀거나 특별한 날에만 화장을 했고, 약간의 우울증과 코로나까지 겹쳐 집에 박혀 사느라 화장을 안 한 지가 얼마나 오랜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가뜩이나 '똥손'인데. 얼굴을 도화지 삼아 연습하는 것도 두어 번 하니 아이섀도우를 발랐다 지웠다 한 눈두덩이가 시려 얼마 못 가 그만두었다.


이것저것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투성이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용보다, 실속보다 겉치장에 공을 쏟고 있는 현실이 슬퍼졌다. 대단하게 꾸미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럴 자리도 아니고, 그저 깔끔하고 단정한 '면접스러움'을 갖추기까지가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울 일인지.




엄마가 면접장까지 차로 태워다주겠다며 일곱 시 반쯤 일어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나는 알겠다고 얼버무리고는 혼자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날 준비를 했다. 이렇게 긴장해서야 세 시간도 모자랄 것만 같았다.


살고 싶지 않아.

면접을 봤다.


행거에 걸린 낡은 L 사이즈 정장.

방문 앞에는 바닥과 뒤꿈치에 반창고를 붙인 검정 힐.

책상 위에는 너덜너덜해진 A4 용지들.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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