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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 Oct 28. 2020

살고 싶지 않아 이력서를 썼다

집은, 가족은 내게 언제까지고 휴식처로 남았으면 했다.

졸업을 앞두고 패닉에 빠졌다.


진짜 내가 졸업을 하는 거구나.

나는, 백수가 되는 거구나.


백수라니. 내가 백수라니. 기억도 나지 않는 세 살 이후로 소속 없이 살아본 적이 없는 내게 무소속, 무소득의 백수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었다. 사실 모든 건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가게 되니까. 하지만 막연히 먼 미래의 일일 것이라 생각하며 대학 시절을 만끽했다. 그 대가가 이렇게나 참혹할 것을 결코 모르지 않았으면서.


만끽했다는 표현도 에둘러 말하는 것일 뿐, 사실 그렇지도 못했다. 가난했고 게을렀기에 여행을 실컷 다니지도 못했고, 대학 내내 살이 쪘기에 예쁜 옷 예쁜 화장을 즐기며 살아보지도 못했다. 자의 반 타의 반 부족한 관심 탓에 연애도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 그것 말고도 또 뭐가 되었든 삶을 즐겁게 만들 대단한 경험 같은 거,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뜩한 취미도 없었고 그렇다고 인간관계가 썩 화려하지도 않았다. 인생을 채워 줄 평생의 절친 같은 걸 만들 줄 알았던 건 아니지만, 언제든 편하게 연락하고 편하게 만날 정도의 친구도 하나 없었다. 물론 공부도 하지 않았기에 받아든 최종 학점도 처참했다.


내가 대학 시절 내내 한 것이라고는 고작 내 용돈 벌이나 하는 아르바이트 삼천 시간이 전부였다. 어떤 기록으로도 남지 않고 남더라도 별 의미 없을, 흘러간 돈벌이의 시간들. 결국 지난 오 년을 치열하게 살지도, 그렇다고 미친듯이 즐기며 살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살았다. 그것이 참담하도록 선명하게 다가왔다. 대체 난 뭘 하고 살았지? 후회가 막심했다. 뜨거울 거면 미치도록 뜨겁게 살고, 차가울 거면 차라리 완전히 차갑게 살았어야 했는데. 왜 나는 이토록 미지근한 삶을 살아왔는지. 사진첩에도 이력서에도 남지 못한 채 흩어져 사라진 나의 스물 이후의 시간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몰라서 괴로웠다.




물론 당장 급한 것은 이력서 쪽이었다. 그러나 상실감이 너무도 컸고, 그것이 곱씹을수록 짙어지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해 갈수록 더 깊은 절망 속에 빠져들었다. 세상에는 기분이 따라주지 않아도 해내야 하는 일들이 많다. 그때의 내게 취업을 준비하는 일도 그와 비슷했다. 그렇지만 당장 해내지 못한다고 해서 길거리에 나앉거나 굶어 죽지 않기에 나는 기분이 따르는 대로 했다.


취업이란 걸 준비할 생각도 하지 못했고, 당연히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물밀듯 다가오는 졸업이 꼭 내 숨통을 조여오는 것 같아서, 죽을 날을 받아놓은 시한부처럼 벌벌 떨었다. 하루를 멍하니 보내고 나서 침대에 누우면 또 내일이 다가오는 것이 겁이 나 눈물이 났다. 한껏 줄줄 울고 나면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공허하면서 잠시나마 숨이 쉬어졌고, 그럼 그 기분에 기대어 겨우 잠을 청했다.




일 년의 휴학이 있었기에 나는 더욱 조급했다. 휴학 없이 스트레이트로 졸업한 친구들이 모두 취업을 했거나 이제라도 다들 하려고 노력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학생인 것은 나뿐이었고, 예나 지금이나 아무 계획 없이 살고 있는 것도 나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이렇게나 별개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의 조급함에 비해 나는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변명하자면 그러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것에 가까웠다. 몸이 가눠지지 않았다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핑계로 들릴지 몰라도 그랬다. 술을 먹은 것도 아니고, 누가 나를 붙들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나도 나 스스로가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루하루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기대에 대한 부채감에 메말라갔다. 마음의 메마름을 또 음식으로 채우고, 그렇게 지갑은 비어가고 몸은 더 부풀어갔다. 악순환이었다.


나는 졸업앨범을 사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일이다. 요즘 누가 졸업앨범을 사? 이렇게 말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나는 학사모도 쓰지 않았다. 내가 졸업하는 2월 말,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졸업식을 취소했다. 모두 아쉬워했다. 인생에 한 번뿐인, 그리고 마지막일 졸업식을 코로나가 날려버렸다며 속상해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면 은근슬쩍 끼어들어 동조했지만 사실 속마음은 그 반대에 가까웠다. 졸업식이 취소된 게 다행이었다. 나는 기쁘게 학사모를 쓰고 졸업장을 받아들 자신이 없었다.


내게 졸업장은 '너 이제 어른'이라는 증표였다. 만 열아홉을 넘어서 주민등록증이 나오고, 술을 마실 수 있고 담배를 살 수 있고 투표를 할 수 있는 그 사전적 어른 말고, 정말 스스로를 돌보고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어른이 됐다는 증표. 그게 미치도록 싫고 부담스러웠다. 계속 책임 없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졸업식을 앞두고, 사 년의 고생이 결실을 맺는 날을 앞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있다면 얼마나 될까. 나는 왜 이다지도 자라지 못하고 책임감 없는, 걱정과 고민과 겁만 많은 못난 성격인 걸까. 이러는 내가 너무 웃기고 싫었다. 내가 치를 떨고 겁낸다고 해서 시간이 멈춰주지는 않기에 결국 졸업을 맞이했다. 2월 15일, 전공 신문방송학사. 이걸 받기 위해 들인 수백, 수천만 원이 떠오르며 허망해졌다.


와중에 관성처럼 아르바이트만은 꾸준히 하면서 한편으로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져 갔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면 마냥 즐겁고 신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하긴, 휴학을 하고서 침대를 뒹굴 때도 이렇게 마냥 쉬면 안 된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짓눌려 살았는데 쉬어가기가 아닌 끝내기가 되어 버린 상황에서의 부담은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할 수 없었다.




우리 딸은 뭐, 이력서는 넣어보고 있나?


거실에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그런 소리를 했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아닌 척해도 나에 대한 기대치가 스물 몇 해 평생을 한없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비록 유치원 시절까지 영재 소리 듣던 애였다지만, 그 나이에 그런 소리 한 번 안 듣고 자라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의 무수한 실패와 좌절과 포기를 그렇게 눈앞에서 보고도 내 부모는 어김없이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내게 기대를 걸었다. 포기를 모르는 건 항상 내가 아니라 부모였다. 나는 그게 참 고맙다가, 안쓰러웠다가, 더러는 짜증이 났는데 이때가 딱 그 짝이었다.


이력서 넣으면 뭐, 어디서 다 면접 오라고 해 준대? 얼씨구나 써 준대?

그러지 말고 어디라도 좀 써 봐. 대기업, 대기업 홍보팀 같은 데에다.


내가 무슨 수로 대기업 홍보팀에 들어간단 말인가. 평균 이하의 학점에 이렇다 할 스펙도 스토리도 없는 일개 지방대 졸업생이. 그냥 이력서는 쓰고 있냐는 질문에도 괜히 혼자 스트레스를 받아 뻗댈 마당에 그런 소리를 하니 더 짜증이 났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빠가 너무 싫었다. 85학번 아빠가 알던 그때 그 세상이 아니라고,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 해도 대기업에 덜컥 들어가던 아빠랑은 다르다고 소리를 빽 지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겨우 삐딱하게 쏘아붙였다.


말이 되는 소릴 해. 어느 대기업에서 날 뽑아? 학점도 낮고 인서울도 아닌데.

그래도 너 글 잘 쓰잖아. 이력서 잘 쓰면 되지. 이것저것 한 것도 많고.


다 거짓말이다. 이것저것 한 게 많은 게 아니라 아르바이트나 죽어라 하면서 가끔 대외활동 몇 개 한 게 전부인데. 그마저도 특별히 대단한 포부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사는 내가 너무 못난 사람 같아서, 아주 작은 무엇으로라도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 지원했다 합격했던 것들이 전부였다. 아빠의 무조건적인 믿음을, 그저 잘 될 거라는 대책 없는 희망을 들으면 들을수록 사실은 전혀 그렇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는 내가 쓰레기 같아서 화가 났다.


아, 됐어. 그만해. 알아서 할 테니까 더 얘기하지 마.


결국 버럭 화를 내고 방으로 들어갔다. 도망치는 것이었다. 거실에서 투덜거림인지 중얼거림인지 모를 것이 들려왔다. 쟤는 무슨 말을 못 하게 해. 우리가 뭐 못 할 말 했나. 그 소리를 들으니 또 화가 솟구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았다. 아무거나 틀고 귀를 막고 싶었다. 노래를 틀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풀꽃처럼 흔해 빠져

여느 다를 것이 없어

풀꽃처럼 작고 작던

너는 여전히 예쁘다


이상하다. 평소 예쁘다고만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게 듣던 노래의 가사가 이상하게 귀에 박혀 빠지질 않았다. 울컥 눈물이 터졌다. 나는 너무도 흔한데, 흔해 빠져 어디서 주워가지도 않을 것만 같은 사람인데 아직도 누군가가 거는 일말의 기대로 어깨가 무거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예쁠 사람이었다. 봐, 아직도 나한테 기대를 하잖아. 나를 예뻐하잖아.


눈에 띄는 화려한 장미로 태어나지 못했고 그렇게 자랐기에 애쓰지 않고 예쁘게 사랑 받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게 비참하고 싫어서 애쓰기를 거부하고 살았다. 그럼 내 지난 삶을 몽땅 부정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떡해. 부정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고, 타고나지 못했다고 무턱대고 다음 생을 기다리기에 내 남은 생은 너무나도 길고 지난한데. 날 좀 자세히 봐 달라고, 오래 봐 달라고 노력해야지.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


한참을 울다 보니 숨이 차올랐다. 이불 속은 너무 답답했다. 꼭 내가 만든 내 세상에, 엉망진창 방공호에 갇힌 것처럼. 이불을 걷어냈다. 훌쩍이며 숨을 들이켜니 훨씬 시원해졌다. 가슴 속이 개운해졌다. 밤마다 느끼던,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울고 나서 잠들기 전의 개운함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노트북 앞에 앉았다. 폴더를 뒤져 이전에 대외활동에 지원하며 썼던 여러 자기소개들을 꺼내 보았다. 몇 가지는 대충 손을 보면 쓸만 할 것 같았다.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그래, 하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자. 일단 해 보자. 아니, 나는 해야만 한다. 그러고도 키패드에 손을 얹기까지 또 얼마가 걸렸다.


살고 싶지 않아.

이력서를 썼다.


집 안에서 침대 속으로 도피하기보다,

회사에서 집으로 도피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은, 가족은 내게 언제까지고 휴식처로 남았으면 했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나를 예뻐하는 곳이니까. 이런 나라도 사랑하는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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