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후회'할 선택을 하지 않고 싶을 뿐인데, 그게 너무도 어려웠다.
세 번째 집은 두 번째 집의 바로 맞은편 골목에 있었다. 집에서 집으로 이동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한 블록도 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세 번째 집도 음식점을 피해 가지는 못했다. 지하 1층에는 이자카야가, 2층에는 칼국숫집이 있었다. 내가 볼 집은 이번에도 4층이었고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없었다.
4층에 올라 벨을 누르자 중년의 여성 한 분이 나왔다. 집주인이시냐 묻자 자기는 그냥 이 집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이 건물 주인은 건물이 하도 많아서, 그 건물을 죄 셰어하우스로 굴리고 있어서 관리할 사람이 따로 필요하다고 했다. 너무 다른 세상 이야기라 아, 그러시구나, 그냥 멍하니 끄덕였다.
지금까지 갔던 집 중에서는 가장 양호했다. 거실은 따로 없었지만 나름 널찍한 공용공간에는 빨래 건조대 서너 개쯤은 펼칠 수 있을 것 같았고, 반반한 식탁과 의자 네 개가 놓인 부엌다운 부엌이 있었다. 싱크대가 정사각형이 아니라 직사각형에, 가스레인지 화구가 세 개라니!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이어서 소개받은 내 몫이 될 방은 본가에 있는 내 방보다 조금 작았지만, 그만한 방이 2인실로 꾸려진 집을 보고 왔더니 이 정도는 호텔 같았다. 어쨌든 네 다리 멀쩡한 침대와, 일단 겉보기에는 별 이상이 없는 매트리스와, 전신거울이 붙은 옷장, 그리고 나름의 공간이 확보되는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 조금 더럽기는 했지만.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기본적인 사항을 더 확인한 뒤 집을 나왔다. 그새 기운을 차린 내가 아무래도 여기가 제일 괜찮은 것 같다며 떠드는데, 동생이 옆에서 말했네. 의외네.
방에 에어컨도 없는데 괜찮겠어? 이제 한여름인데.
어? 에어컨? 에어컨이 없었어?
응, 없었잖아. 거실에 하나 있는 게 다야.
어…… 음…… 괜찮아.
방에 창문도 없어서 좀 답답할 거 같은데.
창문? 창문이 없었어?
그게 다 없었어? 연이어 이어지는 내 질문에 동생은 혀를 찼다. 아니, 대체 뭘 본 거야. 집 보러 가서 그런 것도 안 보고 뭐 했어? 난 또 다 알고도 좋다고 하는 줄 알았네. 잠시 멍해졌다. 동생을 달고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여기서 지내게 된다면 아무래도 여름 내내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잠시 아찔했지만, 이전의 집들에서 느낀 처참함이 다시 찾아오지는 않았다.
음, 뭐, 괜찮아. 괜찮겠지. 그래도 여태 가장 낫다는 사실은 안 변해.
이 정도는 좌절할 거리도 안 된다는 걸 학습한 탓, 아니, 학습한 덕이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마지막 집은 해가 다 저물고 저녁이 되어서야 볼 수 있었다. 보기로 한 집들이 다 나름 가깝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루에 네 군데를 보려니 어쩔 수 없었다. 3층 정도 되는 한 단독주택 앞을 서성이며 문자를 나누고 있으니 저 멀리서 한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냐며 숨을 헐떡이기에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대문을 따고 들어가자 좁은 마당과 1층 현관까지의 서너 개 남짓한 계단이 보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어? 생각한 것과는 매우 달랐다.
가격적인 메리트만 보고 덥석 방문해보겠다 했던 집이어서 자세한 구조나 상황은 듣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소규모가 아닌 대형 셰어하우스였다. 내가 초반에 꿈만 꾸다 가격을 보고 기함하며 포기했던 그런 곳. 그녀는 스무 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방 중 3층에 있는 한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방 바로 앞에는 공용 화장실 겸 샤워실이 있었는데, 슬쩍 봐도 아주아주 좁았다. 그래도 제 방이 화장실이랑 가장 가까워서 좋아요. 어차피 청소는 매일 하니까.
방은 '말로만' 복층인 방이었다. 허리를 채 반도 펴지 못할 정도의 2층에는 매트리스와 짐들이 어지러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2층을 오르는 두 개의 사다리 중 하나는 선반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다른 하나도 어쩐지 튼튼해 보이지는 않았다. 옷이 꽤 많아 좁은 방 한 면의 벽이 전부 다 옷이 걸린 행거로 메워져 있었다.
조금 답답해 보이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지만, 또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보다는 나았다. 텔레비전도 있었고, 지금 생각하면 조금 철없는 생각이지만 그 텔레비전을 보기 딱 좋은 위치에 있는 안락의자가 괜히 마음에 들었다. 비슷한 걸 사서 파묻히듯 몸을 뉘고 텔레비전을 보는 나를 잠깐 상상했다. 그러던 중에 산통을 깨는 집주인, 아니, 세입자의 말이 들렸다.
자신은 잠시 떠나서 지내는 거지 영영 나가는 게 아니란다. 출장을 가는 거라 짐도 절반 정도만 뺄 거고 나머지 절반은 그대로 둘 거라고 했다. 원래는 당연히 글을 올린 35만 원으로는 턱도 없고, 보증금이 2000만 원에 월세가 60인 집인데 자신이 지방 출장을 가게 되어 방을 놀리는 게 아까워 내놓은 것이라면서. 출장이 최소 1년 이상이라 아예 방을 비울 수도 있겠지만 본인은 이 방에 애착이 있다고 했다.
그럼 나는 세입자의 세입자가 되는 건가. 웃기고도 슬픈 일이었다. 설명을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멀거니 방을 둘러보았다. 이 방도 역시, 2000에 60.
서울 정말…… 고되다.
내일까지는 결정해서 연락을 주겠다며 집을 나왔다. 터덜터덜 오늘의 숙소인 모텔로 돌아가는 어깨에는 백팩보다 무거운 근심이 한 짐 가득이었다. 동생과 함께 짐을 풀고 차례로 씻고 나와 치킨을 시켰다. 치킨을 기다리며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생각에 잠겼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벌떡 일어나 몸을 뒤집고 울적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동생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뭘? 어디로 결정할지?
뭐, 그것도 그렇고.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동생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 또 무르고 싶지. 나는 넙치 같은 입술을 하고 끄덕였다. 그렇게 간절했던 취업인데, 그게 돼서 지금 여기까지 온 건데 이 모든 상황이 여전히 실감이 나질 않았고 이제는 기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냥 싹 다 때려치우고 살던 자리에 안주하고 싶다는, 물러터진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치킨이 오기 전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본 네 집 중 마지막 두 집이 그나마 제일 낫더라고, 그중에 내일 점심까지는 골라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보낸 집의 사진들과 설명을 본 아빠는 어차피 1년도 채 지내지 않을 집이고, 또 비용도 더 저렴하고 하니 마지막 집이 낫지 않겠냐고 했다. 하지만 세입자의 세입자로 산다는 게, 짐을 절반이나 두고 언젠가 돌아온다는 암시를 자꾸만 하는 사람의 집을 '빌려' 들어가 사는 게 어딘지 찜찜했다.
조금 더 고민해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빠는 결정만 되면 바로 알려달라고, 보증금과 월세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어쩐지 민망해졌다.
이렇게나 마음이 갈팡질팡하는 걸 보니, 정말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구나 싶었다. 여기서 내가 최선이라고 여겨 선택한 길이 앞으로 두고두고 후회로 남으면 어떡하지.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걷어찼다가 나중에 또 후회하게 되면 어쩌지.
그저 '후회'할 선택을 하지 않고 싶을 뿐인데, 그게 너무도 어려웠다.
치킨은 도착했고, 우리는 먹었다.
그동안도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 밤 안에 모든 곳에 연락을 주어야 했다. 가겠다, 가지 않겠다, 입금하겠다는 연락들을.
긴 고민 끝에 나는 세 번째로 본 집을 선택했다. 회사에서 제일 가까운 편이고, 상태가 양호했던 집. 비록 에어컨도 창문도 없지만 그럼에도 가장 나았던 집. 아빠에게 결정을 알리자 금세 돈이 입금되었다. 보증금으로 두 달가량의 월세인 90만 원과 이번 달 월세가 될 45만 원.
모든 집에 각각 연락을 돌리고 계약금까지 입금하고 나자 큰 한숨이 나왔다. 결국 어떻게든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냥 어디서든 일할 수만 있으면 될 것 같았고, 취업만 하면 다 끝일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시작의 문턱에 다다랐다는 것을 실감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누워서 생각했다.
나 진짜 잘할 수 있을까?
살고 싶지 않아.
살 곳을 구했다.
드디어, 진짜로, 일단은.
넷이 아닌 집은 상상해볼 수도 없던 내가 갑작스럽게 혼자 세상에 나왔다.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