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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 Apr 28. 2021

살고 싶지 않아 홀로서기를 했다

이제 진짜 혼자 사네, 우리 딸.

집을 떠나기 전날까지도 꼼꼼히 챙겼던 짐은 커다란 택배 상자로 세 개가 나왔다. 두 달짜리 서울살이를 할 때는 한겨울에도 두 상자뿐이었는데, 무더운 7월에 나름 겨울옷은 두고 챙긴 짐인데도 두 배는 불어나 있었다. 이게 잠깐 지낼 짐과 아주 지낼 짐의 차이인가. 짐을 싸며 생각했다.


캐리어와 백팩에 의지해 몸이 먼저 올라왔기에 택배 상자는 부모님 손에 방문 택배로 부쳐졌다. 셰어하우스를 결정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영영 진척이 없을 것만 같던 모든 일이 정말 하나하나 진행되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이게 맞나? 모든 게 얼떨떨했다.




첫 출근까지 D-3.


어딘지 무거운 마음으로 셰어하우스를 고르고, 입금까지 모두 마친 후 잠에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셰어하우스로 향해 캐리어와 가방을 놓고 오기로 했다. 입주 결정을 한 지 24시간도 안 되어 집에 들어서려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대충 짐만 던져두고 나와 동생과 강남역 지하상가를 돌며 쇼핑을 했다. 평소 취향도 취향인데다 어느새 반년에 가까운 취준생 생활을 하다 보니 내가 가진 옷들은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는 매우 편한 옷들뿐이었다. 몸무게도 고무줄마냥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해온 탓에 남아나는 옷도 없었다.


여러모로 워낙에 좋게 말해 캐주얼, 나쁘게 말해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는 내게 동생은 조금이라도 입고 다닐 만한 옷을 사자고 했다. 그래 봐야 백화점도, 어느 아울렛도 아닌 지하상가 쇼핑이 전부였지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조차 까마득한, 간만의 쇼핑이 나쁘지 않았다. 즐거웠다.


코너의 이불 가게 하나를 지나는데 가득한 이불 위에 크고 작은 양 인형들이 앉아있었다. 얘네 봐, 너무 귀엽다. 잠시 멈춰서서 보고 있자니 동생이 웃으며 말했다. 하나 사 줘? 혼자 사는데 친구 하나 있어야지.  


중간 크기의 양 인형을 만오천 원에 샀다. 대충 두 뼘 반 정도 되었다. 앞으로 무서우면 옆구리에 딱 끼고 자. 이름도 짓자.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인형의 이름은 양양이가 되었다.


외가 친척들이 어린 나를 놀릴 때 부르던 별명이었다. 명절에 모였다 하면 서 씨 집안 모임에 양 씨가 와 있다며 양양아~ 하고 나를 부르며 놀렸는데, 별것도 아닌 그 별명이 뭐가 그렇게 싫었는지 나는 징징 울며 외가에 가기를 싫어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소외감의 문제였을 테다. 아무리 귀여운 농담이라지만 다 큰 어른들이 나를 둘러싸고, 너만 여기서 성씨가 다르다며 깔깔 웃는 게 어린 마음에도 불편하고 속상했던 거겠지.


그래도 얘 이름이 양양이니까, 이제는 그 지겹던 별명도 조금 좋아질 것 같았다.




쇼핑도 하고 맛있는 밥도 먹으며 동생과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한 칸짜리 작은 방이라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더러울 테니 광이 나게 쓸고 닦으리라 다짐하며 마지막으로 다이소에 들러 온갖 청소용품과 자잘한 생필품들을 한 아름 사고 나오니 어느새 헤어질 시간이었다.


가서 연락해. 그래, 청소 열심히 하고. 별로 애틋할 것도 없이 데면데면하게 손을 흔들며 동생을 보냈다. 2호선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손에 들린 다이소 특대자 봉투가 새삼스레 무겁게 느껴졌다.


집에 들어가자 하우스메이트들 중 관리자 격인 사람이 나와 내게 이것저것 설명했다. 이 집의 기본적인 규칙이나 공용공간 사용에 대한 것들이었다. 나는 내 몫의 선반과 찬장, 냉장고 칸을 안내받고 캐리어와 백팩에 바리바리 싸 온 짐들 일부를 정리했다. 캐리어의 대부분을 압축한 침구가 차지한 터라 정리할 게 많지는 않았지만, 남은 택배들이 오면 전쟁과도 같은 정리 2차전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방의 먼지를 털고, 청소기를 돌리고, 밀걸레질과 손걸레질을 몇 번씩 반복하고 구석구석 닦아냈다.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깨끗해진 바닥을 보며 한숨 돌리고 나니 어느새 밖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이상하게 저녁 생각이 들지 않았다. 피곤함이 배고픔을 이긴 걸까. 바닥에 널브러진 청소기와 밀걸레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그냥 얼른 씻고 일찍 자야겠다. 2시간에 걸친 대청소로 지쳐 느릿해진 몸을 이끌고 정리를 마친 후 가지고 온 여행용 어메니티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며 모든 걸 다 쌌다고 생각한 택배 상자에 샴푸와 린스, 바디워시가 몽땅 빠져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핸드폰을 켜고 주문을 했다. 오늘 청소용품과 자질구레한 것들을 사는 데에만 십만 원은 쓴 것 같은데, 모르긴 몰라도 남은 택배 세 상자가 더 오면 십만 원을 더 쓸 것 같았다. 왠지 의기소침해졌다.




일찍 자겠노라 누웠지만 역시 단박에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한참 유튜브 영상을 보며 혼자 깔깔대다가 와 있던 동생의 카톡을 느지막이 봤다. 청소 잘했어? 응, 잘했어.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답장을 보내곤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엄마 아빠에게 연락 한 통 하지 않았다.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집에는 잘 들어갔냐, 청소는 잘했냐, 지낼 만할 것 같냐는 빤한 질문들을 두 번에 걸쳐 받고 모두 긍정의 대답을 했다. 쇼핑을 좋아하는 동생 텐션에 맞춰 쇼핑을 하느라 힘들었다고 너스레를 떨고, 청소를 하느라 진이 빠져 죽겠다는 엄살도 빼지 않고 늘어놓으며 한참 통화를 하는데, 아빠가 그랬다.


이제 진짜 혼자 사네, 우리 딸.


아빠의 말에 울컥한 것도 잠시, 짐짓 씩씩하게 대답했다.


혼자는 무슨, 여기 셰어하우스야. 나 말고 세 명이나 더 있어.

그렇긴 한데, 그래도 혼자잖아. 무슨 소린지 알면서.


그러게, 나 혼자네. 인정하고 나니 겨우 삼킨 울컥했던 감정이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 서둘러 말을 맺고는 전화를 끊었다. 눈물이 나기 직전의 기분, 몸의 신호. 싸하게 저릿한 가슴을 쥐고 다시 불을 껐다.




정말 울어버리기 전에 차라리 자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늘 그렇듯 베개 밑에 팔을 넣고, 익숙한 베개의 감촉과 냄새를 맡으며 바투 잡고 얼굴을 파묻었다. 베개도, 이불도, 잠옷도 모두 익숙한 것들뿐인데 내가 있는 이곳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결국 눈물이 났다. 이전처럼 하루 이틀, 잠시 잠깐 머물 집이 아니라 앞으로는 여기가 내 집이라고 생각하니 겁도 덜컥 났다. 내내 느껴지던 묵직한 감정과 울렁거림도 전부 이것이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다시 광주로 내려가 가족들이 있는 집의 익숙한 냄새와 함께 십오 년을 잠들고 깬 내 방 내 침대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양양이를 끌어안고 차마 펑펑 울지는 못해 눈물만 뚝뚝 흘렸다.

첫날밤이었다.


살고 싶지 않아.

홀로서기를 했다.


아직은 시작에 불과한 미완이지만, 어쩌면 오래도록 미완일 테지만.

미완인 상태로도 어떻게든 두 발로 딛고 선 채로 살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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