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준비
베이비 붐세대인 우리 시어머니는 시댁의 시짜만 떠올려도 치를 떠는 분이다. 시아버님이 계셔도 공공연히 본인의 시어머니가 하셨던 일에 대한 억울함을 이야기하실 정도다. 우리 남편은 어렸을 땐 그렇게 할머니를 좋아했다는데, 초등학교 이후엔 싫다며 앞에 계셔도 얼굴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시어머니의 시가는 경북 구미다. 시아버님의 사투리 억양은 심한 정도여서 시어머니께선 함께 오래 사셨음에도 늘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으시고 몇 번이고 예? 하며 되물으시곤 했다. 아버님의 사투리 억양은 시댁의 웃음 코드이기도 하다. 남편이 하도 따라 해서 오죽하면 표준말도 어색한데 사투리는 더 어색한 나도 제법 우습게 따라 한다.
그런 시아버님이 편찮아 지시면서 의사소통이 더 어려워졌다. 안 그래도 짙은 사투리 억양에 힘이 없어 발음을 제대로 못 하시니. 하지만 어머님은 이제 되물으시지 않는다. 안타깝게 바라보며 조금 기다려주신다. 평생에 시아버지를 미워하던 어머니에게선 못 보던 모습이다. 사실 아버님이 미워서 내 앞에서 아버님 험담을 늘어놓으실 때마다 내 눈앞에 그려졌던 장면이기도 하다. 세상에 제일 무서운 건 미운 정이다.
그때는 그 장면이 아주 멀고 먼 날 이뤄질 거로 생각했다. 경찰 출신의 아버님은 아주 정정하셨고, 우리 결혼식 전엔 본인보다 20년 이상 젊은 장정의 다리를 부러뜨려서 교도소에 수감되신 적도 있으시다. 퇴소 이후에 가게를 운영하셨다. 홀서빙 같은 허드렛일은 한 번도 해보신 적 없는데도 아주 성실하게 가게를 운영하셨다. 남편이 시부모님과 일하며 메여있는 게 싫어 늘 기분이 언짢던 나는 내심 가게를 닫았으면 하는 마음이 늘 있었지만, 그 가게를 10년이나 운영했다. 너무 성실한 시아버지를 둔 탓이다. 처음엔 싫은 마음만 있었지만, 그런 시부모님을 지금은 존경한다.
23년 현재, 가게는 문을 닫았다. 성실이 그치는 날이 누구에게나 온다. 아버님께 대장암이 찾아왔다. 대장에만 있는 줄 알았던 암은 위에도 있었고. 절개하고 나선 간에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위를 절개하시고 회복하면서 금방 좋아질 줄 알았지만, 18번의 항암을 하며 아버님은 점점 메말라가셨다. 그 와중에도 모두의 만류를 거부하고 가게에 나오셨다.
가게 운영은 한 번도 편안했던 적이 없었다. 늘 위기였고, 늘 힘들었다. 거기에 아버님까지 흔들리시자 무너져내리듯이 문을 닫았다. 언젠가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대비해왔기에 많은 일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시부모님을 근처로 모셨다. 빚은 없앴고 두 분이 생활하실 기틀을 마련했다. 본인이 아니라서 내가 많은 걸 하진 못했지만 온 신경을 써가며 두 분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거동하는 데 큰 문제는 없으셨던지라 무릎이 아프신 시어머니가 아버님을 의지하며 잘 살아가시겠지 했는데 꺾인 건강은 돌아올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생명이 꺼져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잠깐 서 계시는 것도 힘들고 물 한 모금 삼키기도 쉽지 않으셨다. 6개월 전 함께 집을 보러 다니셨던 아버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래도 친정엄마의 암 병력이 도움이 되어서 시아버님 진단받으셨을 때 삼성서울병원부터 쫓아다녔던 나인데, 나으셔서 오래오래 사실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걷다가 눈을 꼭 감고 서서 숨을 헐떡이시는 모습의 시아버지를 보자면 뭐랄까…. 당황스럽고 아프고 슬프다.
내 인생에 아버지란 모습을 새롭게 재창조해주신 우리 시아버지. 한 번도 나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으시고 첫째 며느리가 만능 맥가이버인 줄 아시는 우리 시아버지. 정말 똑똑하다며 우리 엄마보다 나를 더 자랑스러워하시는 우리 시아버지.
어렸을 땐 아빠를 사랑했고 철이 들고선 아버지가 무서웠으며 성인이 되고선 벗어나고 싶지만,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던 우리 남편도 아주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앓는 소리는 우리 시어머니 담당이었는데. 가게를 하며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면 아버님 혼자서 어떻게 지내셔야 할까 고민했었는데. 정반대의 상황이 되니 정말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였는데 막상 너무 가까운 곳에서 죽음을 맞닥뜨리고 나니 알 수 없이 거대한 자연의 섭리와 작은 삶의 무게를 실감한다.
우리 가족의 장점이라면 심각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남편의 위트와 장난일 것이다. 아무도 안 웃는 개그에 나 혼자 깔깔 웃어댔기 때문에 빌어먹을 지금의 결혼생활이 유지 중이다. 속으로 온갖 욕을 다 하면서도 절대로 포기 못 하겠는 건 남편의 정말 재미없지만 나는 웃겨 죽겠는 개그 같지도 않은 개그 때문이다. 그런 남편이 더 이상 아버님의 사투리 억양을 예전처럼 따라 하지 못할 거란 예감이 든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 농담은 아마 조금 긴 시간 동안 금기어가 되어버릴 것이다.
삼성서울병원에서 길병원으로 제1 병원을 옮기고 아버님과 CT 촬영하러 갔던 월요일 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뉴스에서 나온 표현으론 꽃이 우다다 핀다고 했다. 전국에서도 인천은 벚꽃이 제일 늦게 피는 지역에 속한다. 작년 이맘때쯤이었으면 아직도 찬바람이 피고 잔가지들이 무성했을 텐데. 개나리와 철쭉만 피어서 벚꽃은 언제쯤 피나 설레며 기다렸을 텐데.
기상 온난화 때문이라고 하지만 탐스럽게 핀 벚꽃이 고마웠다. 걷지도 못하시고 누워있는 것도 힘들어하는 아버님께서 병원에 가는 택시 안에서 숨을 몰아쉬시며 잠깐은 보셨을까 싶었다.
나와 남편, 우리 아들은 여행을 가본 적이 별로 없다. 우리 자의로 셋이서만 여행을 떠난 건 딱 두 번, 1박 2일로 부산에 다녀온 것과 가게일 때문에 밤 11시 넘어 겨우 숙소에 도착해 1박을 했던 강화도 여행이었다. 여행은 늘 시댁과 함께했다. 어린 마음에 불평불만이 많았는데 다시 여행길에 오르기 힘드실 것 같은 아버님을 보니, 마지막으로 떠났던 강원도 여행이 참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강원도에 도착해 첫 식사를 끝내고 바로 숙소로 들어가기엔 시간이 애매했다. 회와 도루묵을 좋아하는 아버님은 항구의 수산시장을 둘러보고 싶어하셨다. 가족 중에 수산시장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수산시장과 흥정을 좋아하는 나와 아버님이 둘이서 데이트를 했다.
인덕션밖에 없는 펜션에서 도루묵을 사셔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할 때 맥가이버 첫째 며느리인 내가 한 식당에 들어가 돈을 드릴 테니 도루묵찜을 해줄 수 있냐고 흥정해서 OK 사인을 받았다. 도루묵 조림을 기다리는 동안 속초항을 바라보며 아버님과 커피믹스를 마셨다. 어머님은 그런 걸 괜히 사서 애를 고생시키신다며 아버님을 타박하셨지만 나는 좋았다. 아버님이 나를 좋아해 주시는 것도 좋았고 파란 하늘이 비친 맑은 동해를 함께 보는 것도 좋았다.
나는 아직 어머님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되어있다. 책잡을 것 많은 며느리지만 나름의 소통의 시간이 쌓여 겨우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늘 깜냥 안되는 며느리. 마음에 차지 않으셨을 것이다.
좋게 지내려 애쓰지만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라고 한 번씩 말실수하시며 나를 속상하게 하신다. 게다가 남편은 친정엄마도 숭고하다고 인정하는 효자다. 늘 든든한 방패막이였던 아버님이 안 계시면, 난 정말 어쩌지?
아마 다들 마음 정리를 하는 것 같은데 우습게도 가족도 아닌 내가 제일 마음 정리가 안 되는 것 같다. 남편에게 담담하게 장례식장과 유골함 모실 곳을 상의하고 혼자되실 어머니 거처를 상의한다. 내가 아무 감정 없는 냉혈한처럼 보이겠지. 아버님 장례식 때문에 못되게 굴어서 꼴도 보기 싫은 동서와도 먼저 손 내밀어 사과했다.
아니다 어쩌면 온 가족이 아직 실감하고 있지 못 한 걸지도 모르겠다. 미리 준비하는 습성의 내가 앞서서 슬퍼하며 준비하고 있는지도.
비가 온다.
아버님과의 마지막 여행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아침에도 이렇게 비가 왔었다. 한 번 더 여행을 갈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