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주부에게 이름이 필요한 이유
남편분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집사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본다. 그때 집사는 내게 화석 같은 선배였다. 같은 학교 동일 재수강 과목을 듣는 학번이 4년이나 높은 선배. 1학년 물리 실험 조에 같이 배치되어 알게 되었는데, 그는 촌스런 동그란 은색 테 안경을 쓰고, 빛바랜 퍼런 점퍼를 즐겨 입곤 했다. 그러고 얼마 안 가 3개월 뒤쯤부터 그 선배는 오빠가 되었다. 수업을 같이 들으며 친해지기도 했고, 수업을 핑계로 도서관을 다니며 친해진 덕이라고 해야 하나.
이후 7년이 지나, 그 오빠는 나와의 관계에서 또 다른 세 가지 공식적인 호칭을 얻었는데 '배우자', '남편', '송서방'이라 간추려 말할 수 있겠다. 뭐 사실 이 외에도, 우리 집사는 꽤나 호칭 컬렉터라고 할 만큼 많은 호칭을 갖고 살았더란다. 대리, 연구원, 설계사 등등.
이런저런 호칭으로 불렸던 집사의 과거를 고려한다면, 호칭의 나라 한국에서, 집사는 꽤나 부자에 속하는 편이었다. 적어도 '전업 주부'로서의 삶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국에는 호칭 부자도 돈 주고 못 사는 것이 있는데, 바로 남자 주부를 일컫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한국인들은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이름을 말하면서 주로 직급이나 직업, 일명 호칭으로 일컬어지는 것들을 많이 소개하지 않는가? 선생님, 엄마, 아빠, 과장, 건축사, 연주자, 작가 등 수도 없이 많은 수식어를 기호에 맞게 선택하며!
그런데 남자 주부는? 특히, 아이도 없어서 '누구 아버님'으로도 불리지 못하는 남자 주부들은 대체 무엇으로 불려야 한단 말인가 (독자님들, 혹시 이거 아이디어 있으면 공유 좀 해주세요).
이건 호칭부자였던 집사에게도 겪어보지 못한 큰 시련이었고, 덩달아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마님에게도 엄청난 고민거리였다.
"남편분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이것이 마님이 들었던 가장 흔하디 흔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떠올려 보면, 여자가 주부인 경우 '사모님', '~어머님(아이가 있는 경우)'과 같은 부르기 쉬운 호칭이 많은데! 남자 주부에겐? 딱히 쓸만한 것이 없다.
'남편 분'이라고 하자니 처음만 괜찮지 자주 부르다 보면 어색해지고, '사장님'이라고 하자니 사실 사장님도 아닌걸! 그래서 편하게 이름을 불러달라고도 몇 번이나 요청해 봤지만, 한국인들에게 너무나도 어색한 이름 부르기(00 씨)는 결국 언어를 상실한 몸짓으로 돌아왔다.
아, 어.. 저기..
라는 짧은 추임새를 시작으로, 눈을 쳐다본다든지, 손으로 살짝 팔을 치는 척한다든지,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든지, 눈짓, 손짓, 몸짓, 3단 콤보를 시전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단 말인가. 왜 우리말을 쓰는 한국인들은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가. 우리에겐 이렇게 아름다운 시도 있지 않은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때는 2018년, 케냐에서 해외 생활이 막 시작되던 무렵, 집사를 소개할 일이 많아지고, 지인들과의 모임이 잦아지면서 우리는 없는 호칭 같은 건 패스하고 새로운 이름을 짓기로 했다. 한국인들도 거부감 없이 마음껏 불러 재낄 수 있는 영어 이름으로!
미드를 보라! '님'자와 '씨'자 따위는 없는! '이름'으로만 불려도 어색하지 않은 그 힙한 공기를. 그래서 우리는 그 바이브를 이어, 집사에게 'Lucas'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케냐에서 가장 흔하게 많이 들었던 이름이기도 했고 어쩐지 낯설지 않은 정감이 있어서, 놀랍게도 그 이름을 정하는 데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저희 남편 000이고요, 집안일을 하고 있어요. 루카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요즘 그렇게, 집사는 새로운 이름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거리를 지나가다 누가 '루카스'라고 부르기만 해도 뒤를 돌아보는 걸 보니, 나중에 가짜 민증이라도 하나 더 만들어서 선물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그런 선물은 왠지 마음이 시리다. 호칭이 없는 그의 자리도, 호칭이 있어야만 편한 이 사회도, 그저 변화를 기다리기엔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과 가족을 돌보며 살아가는 그의 삶. 나는 언젠가 그런 남편의 세월을 따뜻한 호칭으로 마구마구 불러주고 싶다는 바람만을 깊이 간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