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렁뚱땅 '집사 생활' 매뉴얼 (2)
36년간 가족의 식단을 책임져온 마님의 모친, 이 여사는 요즘말로 집밥계의 ChatGTP다. 음식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그녀는, 재료 하나만 입력해도 재료관리법과 응용법을 단숨에 토해낸다. 모든 주부가 그렇지 않냐고? 노놉! 그녀의 이런 해박한 지식은 결코 쉽게 형성된 것은 아니다. 뭐랄까, 엥겔족을 책임지는 대모의 숙명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나.
그녀는 입맛 까다로운 부족장 한사장의(마님의 아빠다. 개인사업체를 운영하니 사장이 맞긴 하다.) 와이프로, 부족의 '전속요리사'에 더 가까웠다. 이 여사의 하루는 주로 부엌에서 시작돼서 부엌에서 끝났다. 가끔 그녀가 식탁에서 머리를 쥐어 싸매고 한숨을 푹푹 쉬고 있다면, 그건 백이면 백 식단 문제다. 가족들의 취향을 고려해 매끼 식단을 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기 때문이다.
"엄마~ 오늘 저녁 뭐 먹을 거야?"
"보쌈할까 싶은데~ 굴이랑 같이"
(딸) "오케이~ 그럼 일찍 들어올게요!"
(아들) "아, 나는 보쌈 별로인데. 보쌈 말고 다른 거 없어?"
(부족장) "보쌈할 거면, 배추된장국 끓여서 먹읍시다~"
메뉴 하나가 던져지면 다양한 의견과 함께 추가 메뉴들이 줄줄이 딸려왔는데.. 고든램지가 와도 이 난관을 헤쳐나가기란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늘이 그렇게 무심하지는 않았다. 이 여사에게는 음식이라면 아이디어가 넘쳐흐르는 K-장녀 한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이 여사와 거실에 앉아 부족원들의 취향을 고려한 다양한 식단을 짰다. 이 여사의 초록빛 수첩이 빼곡하게 적히는 그 시간은 흡사 유엔 식량 안보회의를 방불케 했는데, 이 모습을 본 동생은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휴, 정말 힘들게 산다."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지금도 힘들게(?) 살고 있다. 결혼하고 집사와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K-장녀에서 여가장으로 역할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식단 짜기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싫냐고?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음식을 먹어보는 게 소원인 여가장에게, 먹는 걸 계획한다는 건 아직 다가오지 않은 여행을 계획하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니까. 다만, 예상치 못했을 뿐.
우리 집사는 분명 만능집사가 맞긴 하는데, 일부 주제에 대한 지식과 관심은 현저히 낮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음식이다. 말인즉슨! 특정음식을 요청하면, 어디서 레시피를 공수하는 건지(아마도 유튜브가 아닐까 싶다) 그 요리를 정말 뚝딱 해내긴 하는데, 메뉴에 대한 아이디어를 고안하는 것은 기능밖의 요구사항인 것이다.
"집사님, 오늘 저녁메뉴는 무엇입니까?~"
"(한숨)..... 하아"
"오잉, 왜? 저녁 메뉴 아직 못 골랐어?"
"(한숨) 아 뭐 먹지"
웃겨 보이는가? 귀엽다고 느낄 수도 있다. 찰리 채플린이 말하지 않았던가 '인생이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이것이 우리 집의 몇 안 되는 비극의 장면이다. 왜냐하면! 마님은 고단한 노동 끝, 퇴근 이후에는 맛있는, 준비된, 나만을 위한 집밥을 먹고 싶은데, 결혼 초기에는 집사가 전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준비가 안 돼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지만, 마님에게 먹는 시간이란 하루 중 가장 숭고한 순간이다. 그런 시간을 '대충', '계획 없이' 보낸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에 가까웠고, 이 스트레스는 결국 몇 번의 싸움으로 번졌다. 우리 집에서 피해야 하는 3대 비극이 있는데, 바로 이 '식사 비극'이 그중 단연 으뜸으로, 분명 해결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집사는 음식, 정확히는 식사에 관심을 가져보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애초에 사람이 관심이 없는 걸 공부하는 건 지옥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마님은 그런 집사의 괴로움을 덜어주고 동시에 '내가 먹고 싶은 것만 맨날 먹는다'라는 욕심으로 치밀한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바로 마님이 일요일 저녁, 일주일치 아침, 점심, 저녁 식단을 짜서 집사에게 하달하면, 집사는 그 메뉴를 받아 필요한 식재료를 구매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요리를 해내는 것이다. 다행히 집사는 요리사로서 갖추어야 할 '청결성', '체력', '미각', '후각'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보라! 만능집사의 능력을), 요리 자체를 하는 기능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집사 생활 매뉴얼 2번, 요리 아바타가 되어라'인 것이다.
집사에게 '요리 아바타' 기능이 부여된 후, 마님의 하루는 한층 더 즐거워졌다. 무엇보다 아바타의 역량이 점점 향상되면서, 가끔 메뉴가 업그레이드돼서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땐 아낌없이 칭찬을 부어준다. 최근에는 한국에서 먹었던 그릭요거트가 너무도 먹고 싶어 흘러가는 소리로 노래를 불렀는데, 6개월 전 아침부터는 정말 꾸덕한 그릭요거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니, 오빠,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 이거 여기서 만들기 힘들 텐데."
" 마님, 저희에게는 다행히도 육수를 내기 위해 한국에서 공수해 온 육수팩이 있습니다. 그 육수팩으로 유청을 걸러보니, 그릭요거트가 되더라고요. 아직 많이 꾸덕하지 않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이고, 집사님 매우 훌륭하시군요. 다음에는 더 꾸덕한 요거트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물론 가끔 음식에 대한 기본정보 부족으로 오류가 나기도 한다.
"집사님, 저는 샐러드 파스타 주문했는데요?"
"그래서 샐러드랑 파스타 준비했는데??"
"그게... 따로가 아니라 샐러드가 들어간, 다이어트 파스타요!"
(침묵과 멋쩍은 웃음)
"괜찮으시면, 다음부턴 꼭 메뉴 사전검색 한번 부탁드립니다 (근엄)"
내겐 너무 당연한 것도 진심을 다해 잘못 해석하는 집사의 모습은, 흡사 개그콘서트의 콩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어이없고 귀여운지, 가끔 나는 그의 잘못된 해석을 기대하며 함정 메뉴를 짜기도 한다.
부엌을 들어서면 집사의 흔적들이 그 어느 곳보다 가득하다. 머리카락 이탈 방지를 위해 쓰는 집사 전용 캡모자, 마님의 취향을 잔뜩 반영한 케냐에서 공수해 온 보라색 앞치마, 집사가 즐겨 쓰는 조그마한 나무 도마와 그릇들의 완전 건조를 위해 살짝 열어둔 식기 세척기. 나란히 정렬된, 누군가만의 규칙으로 정리된 부엌은 침범하면 안 되는 고요한 성지에 들어서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마루에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고 있다 보면, 부엌에서 음악소리가 들린다. 좋아하는 음악을 흥얼거리며 모자를 눌러쓰고 요리하는 집사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지는 소리다. 가끔 귀찮음을 툴툴거려도 언제나 마음을 다해 요리하는 집사가 있기에, 식단을 짜는 마님의 주말은 언제나 즐겁다.
그러나 때로는 한두 끼 정도의 식단은 아무것도 적지 않은 채 집사에게 건네기도 한다. 기분이 좋지 않거나 힘든 날에도 의무적으로 부엌에 서야 하는 집사. 가족의 식사를 책임져야 하는 그런 집사의 모습이, 친정에 가면 늘 부엌에 서있는 엄마의 뒷모습과 닮아 있어서.
"집사님~~ 남편!"
"왜 오늘 저녁은 식단이 없어? 지금 알려줘야 빨리 준비하는데!"
"노노~! 오늘은 필요 없다네! 가자~ 외식이다!"
집사의 얼굴에 슬며시 웃음이 피어오르고, 덩달아 내 마음은 바람처럼 가벼워진다. 오늘 우리는 한껏 가벼운 마음으로 날아가, 무거운 몸으로 집에 돌아올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