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렁뚱땅 '집사 생활' 매뉴얼(1)
집사는 내가 집에 오면 언제나 45도에 가까운 예의 바른 인사를 선사한다. 특히, '땅! 땅! 땅!!' 노크 3번에도 열리지 않는 문을 원망하며 벨을 마구 눌러 댈 때면, 그의 인사는 한층 더 정중해진다.
파라과이 중심에 위치한 이 아파트는 오직 열쇠로만 문을 열 수 있는데, 집사는 마님에게 열쇠를 맡기는 법이 없다. 무엇이든 던져 놓고 까먹는 마님의 습성을 고려했을 때, 보안이 생명인 열쇠를 맡긴다는 것은 매우 무모한 짓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 덕에 우리 집사는 내가 퇴근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하던 일을 모두 올 스톱! 하고 문 근처를 서성이며 노크 소리에 귀를 쫑긋 기울이곤 한다.
집사의 오후 일과는 다과상 내오기로 시작된다. 마님이 정갈한 세욕 후 추리닝으로 변복하는 동안, 집사는 과일을 내오거나 그날의 차를 준비한다. 대부분 마님의 최애 과일, 감이 그 주인공이다. 그 달달하고 요망한 것이 입속에 들어가면, 피곤에 찌들어 있던 마님의 얼굴에 다홍빛 혈색이 돈다.
우리는 식탁을 가운데 마주한 채 과일을 노나 먹으며, 오늘의 9시 뉴스를 시작한다. 각자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아주 사소한 것부터 대박 사건까지 차례로 브리핑하는데, 대체로 집사가 먼저 시작이다. 아침엔 어떤 운동을 했는지, 점심으로는 무엇을 먹었는지, 스페인어 과외는 할만했는지, 한국에서 연락온 지인은 없었는지 등등.
여기서 관전포인트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집사의 표정이다. 시시콜콜한 빨래 돌린 이야기나, 잠시 낮잠을 잤었던 이야기도 빼먹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집사의 모습은 언제 봐도 재미있다. 가뜩이나 작은 눈은 마시멜로처럼 더 납작해지고, 눈만큼이나 콩알 같은 입술은 더 오므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아진다. 그럴 때면 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곤 한다. 미래의 우리 아이가 이런 집사의 입을 닮으면, 상추쌈을 야무지게 한입에 먹을 수 있을까?
애초에 기억력이 좋지 않은 집사는, 가끔 이 뉴스 브리핑 시간을 가끔은 피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아, 오늘은 정말 한 거 별거 없는데. 그냥 밥 먹고 집안일했는데."
말하기 싫은 티를 누구나 알 수 있게 팍팍 내보지만, 별수 없다. 마님은 절대로 그날의 일과를 속속들이 듣기 전까진 집사를 놔줄 생각이 없다. 이 시간은 우리 집 생활 수칙에서 매우 중요한 스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럼 결국 집사는 없었던 걱정도 생길 만큼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무언가를 말하긴 한다. 하도 뜸을 들여 이야기해서, 가끔은 이 이야기가 임기응변을 위한 소설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물론 금세, 원체 거짓말을 못하는 집사의 성격을 떠올리고 안심하긴 하지만.
집사는 본래 자기 이야기를 잘 못하는 사람이다. 연애할 때는 같이 학교에, 관심사도 비슷하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그나마 했었다. 하지만 전업 주부가 된 이후, 사회생활이 현저히 줄고, 해외생활로 만나는 사람마저 줄어들며 말 수가 점점 없어졌다. 그런 집사의 변화 속에서 나는 직감했던 것 같다.
이 사람에게도 말할 사람이 필요하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세상에 고할 그런 시간.
그 깨달음 이후, 나는 집사의 생활 수칙 첫 번째로 '별것 아닌 일상도 제대로 공유하기'라는 조항을 만들었다. 이것은 우리 '집사 생활 매뉴얼'의 첫 조항으로, 결혼생활 8년이 지나도록 거의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실천한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 서로가 보지 못한 시간을 쌓아간다. 그날의 상대의 기분을 엿보고, 고단했던 하루를 짐작한다. 때로는 공통점을, 또 때로는 다른 점을 찾으며 별 것 아니었던 일에 열을 내고 웃기지 않았던 일에 낄낄댄다. 지나갔던 시간을 되감아 집사와 다시 듣고 있자면, 새로운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 신기할 때가 많다.
나는 집사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야 회사에서 일어난 일들을 빠짐없이 털어놓는다. 주로 일 보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우리 집사는 내 회사 주변인을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다.
왜 누구 있잖아. 그 예전에 축구한다고 했었던..
그러면, 집사는 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그 사람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맞힌다. 그 능력은 가끔 내 동료들로 하여금 집사가 같은 회사사람이 아닌지 하는 착각에 들게 하기도 한다.
"아니, 루카스 님 그냥 명예직원으로 들어오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ㅋㅋ 저보다 더 많이 아시는데"
하루 종일 집안에서 자신만의 싸움을 하는 집사의 대나무 숲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나의 작은 희망은, 생각지도 못하게 우리 집에 큰 평안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서로의 일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비록 떨어져 각자의 소임을 하지만 누구보다 그 일상에서 오는 고단함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전업 주부를 해본 적이 없는 나는 남편이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개고 설거지를 끝낸 하루의 아침을 엿보며 깨끗하게 정리된 주방과 반듯이 걸린 옷들에서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아주, 아주 가끔, 그의 모습에서 매일이 전쟁 같았을 엄마의 모습을 떠올린다.
나는 때때로 집사를 내쫓는다. 날이 좋은 날에는 볕을 가득 쐬며 걸을 수 있는 골프장으로, 궂은날에는 실내 빠델(남미에서 유행하는 테니스와 유사한 스포츠) 장으로. 때로는 내게도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외치며, 나가기 싫어하는 집사를 뻥 차서 내보낸다.
어쩌다 가끔은 집사의 9시 뉴스에도 특집기사가 나길, 그래서 신명 나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길 바라며.
요즘 우리 집사는 '집사 생활 매뉴얼'을 귀찮아했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시키지 않아도 먼저 나서서 행동한다. 지난 수요일, 피곤한 몸을 주체 못 하고 식탁에 앉기도 전에 소파에 널부러져 누운 마님에게, 집사의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어?~"
그럼 이번엔 마님이 마지못해 대답한다.
"아 오늘 진짜 별거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