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미래 연구소
오늘의 기분 점수는 몇 점이시죠?
집사의 생각을 읽기 위해, 궁예의 관심법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말수가 적은 집사는, 어쩌다 하고 싶은 말이 생겨도, 오랜 뜸 들임이 필수 관문이다.
"있잖아, 근데 말이야... (10초 정적)"
"(마님 속마음) 아, 대체 언제 말할 거냐!"
그래서 그 밥이 더 맛있냐고? 아니다. 대사 한 줄, 한 줄 어찌나 정성을 다하는지, 쿨타임이 꽤나 길다. 하고픈 말을 다 할 때쯤, 이미 밥은 훅! 식은 상태. 그러니 성격 급한 마님은 속이 터진다.
도대체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걸까. 얼굴은 죽상인데, 대부분 별일 없다 말하는 집사. 이유 없이 잔뜩 풀 죽어있는 집사를 보면, 마님은 덩달아 예민해진다. 새하얀 대리석 마루는 진흙탕으로 변하고, 불만으로 지배당한 마음은 탈출을 포기하고 허우적댄다. 부부전쟁 발발 일 초 전!! 늦기 전 마법의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집사님, 오늘의 기분점수는 몇 점이시죠?"
"80점인데요?"
"(얼굴은 40점인데 뭘) 진짜 80점이세요?"
"70점인 것 같기도 하네요."
자신의 기분을 객관적으로 보고, 불필요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만든 우리 부부의 주문. 가끔은 이 주문만 외워도, 집사의 기분이 회복물약을 먹은 듯 살아난다. 이마에 깊은 주름이 반듯이 펴지고, 조용했던 입술이 쏠랑 움직이는 마법.
하지만 그런 집사에게도, 마법이 통하지 않는 날들이 더러 있다. 아무리 환한 조명을 켜도, 잘 보이던 것들이 이상하게 희미해지는 날. 그런 날이면 나는 집사의 '마님'도 '와이프'도 '친구'도 아닌, 지독히 사적인 '상담사'가 되길 자청한다.
식탁은 상담 테이블이 되고, 그 위에는 진실을 말하게 하는 포도로 빚은 음료가 놓인다. 상담 예상시간은 2시간.
"남편, 이리 좀 와보세요. 저랑 얘기 좀 해요."
미묘하게 달라진 마님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질질 끌리는 그의 슬리퍼 소리. 나는 깊게 숨을 마시고 내쉬며 되뇐다. '조급하지 말자. 답답해하지 말자. 해결책을 제안하지 말자.' 한 번도 동시에 성공한 적 없는 이 결심을, 일단 외쳐본다. 자, 상담준비 완료!
이 손님은 우리 상담소의 단골손님이다. 최근 7년간 다녀간 횟수를 따지자면 1년에 4번, 즉 나와 30번 이상 상담을 진행했다. 그렇다고 이 사람에 대해 잘 아냐고? 글쎄. 상담을 진행하며 속 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긴 하지만.. 잘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언제나 상담이 실패로 끝났기에, 웬만하면 모르는 사람이다 생각한다.
올해로 40이 된 손님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은 편이다. 특히 7년 전 전업주부로 전향한 뒤로, 고민이 더 깊어진 듯했다. 전업주부가 힘들고 지루해서냐고? 그건 아니다. 다만, 집안일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다고 해야 하나.
손님은 남자인데, 그렇다 해서 같은 고민을 들고 오는 여자 손님과 다를 게 없다. 전업주부를 선택했지만, 무언가 다른 세상에서도 나의 쓸모를 찾고 싶은 마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이는 자꾸만 많아지고, 왠지 내가 발 뻗을 곳이 좁아지는 느낌.
손님은 대학졸업 후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거치며 사회생활을 했지만, 와이프를 따라 해외로 나오면서 전업주부가 되었다고 했다. 처음엔 해외 일도 찾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첫 근무지 케냐는 열악한 환경, 두 번째 파라과이는 언어라는 장벽이 있었다. 오랜 방황에 지쳐있던 손님은, 요즘 들어 부쩍 이런 말을 많이 했다.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없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것 같아요. 무엇보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유 없이 와인 잔 밑동으로 원을 그리던 손님은, 말끝을 흐렸다. 손님이 절망의 언어를 하나씩 얹을 때마다, 애써 평정을 유지하던 내 마음은 자꾸만 감정적으로 기울었다. 내가 이런 방황에 원인을 제공한 건 아닐까. 설상가상, 상황을 지켜보던 감정들은 무리 지어 몰려나와 기다렸다는 듯 한 마디씩 한다
'(기억 서기) 야, 그땐 그 사람도 자신이 원하는 결정한 거야!'
'(이성 대장) 저건 모두가 갖고 있는 고민이라고! 너도 갖고 있잖아?'
'(불만 쟁이) 또?! 그 고민이네! 그냥 뭐든 시작해 보라고 좀 하자.'
그 사이 진실의 음료를 몇 번 홀짝 한 손님의 얼굴은 자두빛이 되었다. 나는 터져 나오는 함성소리를 쥐포로 틀어막는다. 턱근육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뭐든지 그냥 해보고 마는, 나와는 다른 남편. 물건 한 개를 사더라도 한 달이 걸릴 지경이니, 미래의 일을 고른다는 건 얼마나 어려울까.
"오늘 마음이 좀 그랬어요. 이제 곧 한국에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서 빨리 뭔가를 찾아야 하는 건 아닌가. 그럴 땐 설거지고 뭐고 다 하기 싫어지더라고요."
어쩐지, 가끔 늘 정돈되어 있던 집안에 흐트러짐이 보였다. 집사의 마음에 생긴 균열은, 언제나 집안에서 티가 나곤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오빠,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어."
사실 어쩌면, 더 조급 한 건 손님보다는 내쪽일지도 모른다. 상담소 운영기간이 길어지면서, 답을 찾아주고 싶은 욕심도 함께 컸다. 고백컨데, 가끔 내 인생이 힘들 땐, 내가 언제까지 이 손님 진로상담을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면 그 상담은 늘 망했다.
"아니, 오빠, 자신감을 좀 가져봐. 내가 볼 땐 오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그리고 좀 여기서도 이것저것 해보려고 해 봐. 결심 서고 하려니까 더 못하는 거 아니야? 시도를 해봐야 맞는지 안 맞는지도 알지."
상담사는커녕 어느새 평가자가 되어 앞에 선다. 왜 가장 가까운, 내 삶을 함께 해주는 사람의 삶을 나는 평가하려 드는 걸까. 그러던 내게, 얼마 전 상담에서 손님은 내 머리를 띵 하게 하는 질문을 던졌다.
"윤정이는 내가 이런 일 한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앞으로 윤정이가 하는 일이랑 잘 맞춰서 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가 같이 삶을 꾸리는데 도움이 될까?"
나는 그때 처음으로, 상담사를 자청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우선해 주었던 남편. 해외에 나가는 것도, 집사가 집안일을 하게 된 것도 모두 각자가 자신을 위해 내린 결정이라 생각했다. 서로 원하는 선택을 한 거라고. 다행히 그 선택이 일치했다고.
그런데 이제 보니, 나만 그랬던 건 아닐까. 집사가 해준 배려들을 누리면서, 오히려 그를 평가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얼마 전 '밉지 않은 관종언니'라는 프로에서 나온 짤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말이 꼭 나를 향해하는 말 같았다.
아내와 남편이 다 잘되는 부부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누군가 더 잘되지? 그럼 이 사람 운까지 내가 갖고 온 거야.
나는 진로상담소 문을 닫았다. 개업한 지 7년 만에 폐업. 대신 다른 간판을 올렸다. '우리 집 미래 연구소'. 생각해 보니 집사의 고민은 집사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미래가 결국 우리의 삶이 되고, 그 삶이 나의 행복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분명히.
지금도 여전히, 고민도 많고 결심도 느린 집사가 나는 속 터진다. 그래도 괜찮다. 다만, 가끔 집사의 고민에 한마디 던지긴 한다.
나는 오빠가 '우리 가족', '나' 말고, 지금은 오빠만 생각해서 결정했으면 좋겠어! 그게 어떤 선택이든, 응원할게! 그러니까 오래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가보자.
40대 주부, 집사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살아갈 시간을 걱정하는 건, 우리 모두의 숙명이니까. 그러나 이제 그 고민은 외롭지 않다. 당신의 고민과 맞잡은 내 손은 무거워졌지만, 함께 걷는 발걸음은 호로록 가벼워졌다.
우리는 느리더라도, 성큼성큼 나아갈 것이다.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선다. 흐트러진 쿠션에 널부러진 집사. 무언가 감지되는 이 분위기. '우리 집 미래 연구소'가 첫 개장의 문을 열 시간이 왔다. 나는 정갈히 옷을 갈아입고, 부러 씩씩하게 외친다.
"어서 오세요! 연구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