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당연한 것들은 언제나 외롭다.
가장의 월급은 외롭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매월 승리를 거두고 돌아 오지만, 반겨주는 사람이 없다. 터벅터벅 집에 온 월급. 그를 기다리는 건 전기세, 수도세, 보험비 등, 매월 정기모임을 하는 고정지출 협회원들뿐. 그의 치열한 전쟁 서사와, 땀으로 흠뻑 젖은 군복은 잊힌 지 오래다.
월급은 떠올려본다. 첫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집에 왔던 그날을. 가족들 모두 내가 돌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25일', 내가 은행 초인종을 '띠링' 하고 누르면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럼 나는 자랑스럽게 들어가, 통장을 우아하게 흔들며 답했었지.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
승리가 잦아지던 어느 시점부터, 가족들은 더 이상 나의 귀환을 기뻐하지 않았다. 어떤 적군을 만났는지, 전쟁터가 얼마나 험했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간혹 딸려오는 상품권 같은 전리품에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였다. 나는 당연해졌고 동시에 외로워졌다. 나의 승리를 기뻐하지 않는 당신, 당연한 것들은 언제나 외로운 걸까.
마님은 23일이 되면 마음이 설렌다. 곧 월급이 들어오는 날! 노동의 대가로 받는 월급은 언제나 달콤하다. 뭐랄까, 용돈 받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뭘 살지 고민하던 그 느낌? 얼마가 찍힐지 뻔히 알면서도, 입금 알림 문자가 울리면 괜스레 뿌듯해진다.
결혼 전에는 월급날마다 마님의 술 베프인 오선생과(마님의 20년 지기) 매번 약속을 잡았다. 월급쟁이들에게도 한 달에 한번, 자신의 노고를 치하하는 날은 있어야 하니까. 보통은 고기와 국물이 한큐에 해결되는 순댓국이나, 부추 무한 리필이 가능한 곱창을 찾았는데, 가장이 되고 나선 사정이 좀 달라졌다.
더 성대해졌냐고? 아니다. 오히려 매우 소박해졌다. 성찬의 날이 사라졌다고 하는 게 더 맞으려나. 집밥을 선호하는 집사의 취향도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 월급에 무관심한 집사.
"남편~ 오늘 월급날이야!! 확인해 봤어?"
"들어왔겠지. 어차피 같은 금액인데 이따가 볼게."
"(서운함 장전) 그럼,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나갈까?"
"맛있는 거? 왜?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월급날인데, 그래도 그냥 기분내면 좋잖아~!"
"먹고 싶은 거 없으면 글쎄,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짜증 발사) 너무하네, 알겠어. 그냥 집에서 먹자."
보통은 발사까지 나가지 않는 게 순리인데, 작년 11월, 나는 집사에게 그간 장전한 서운함을 모아 따발총을 날렸다. 하필 그날은 몇 안 되는, 회사를 관두고 싶은 날이었다. 일보다 사람이 힘들었던 날. 집에 오며 생각했다. 이런 사람과 일하며 나를 갉아먹기보다, 그냥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다고. 잠깐 2달, 아니 3달만 무인도에 가고 싶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은 가장에게 사치다. 사치를 부리고 싶은데, 욕심대로 되지 않을 땐, 괜히 심술이 난다. 우리가 맞벌이였다면, 나 혼자 돈을 벌지 않아도 됐다면. 괜히 엄한 불똥이 집에 있는 남편에게 튄다. 불똥만 튀면 그나마 수습이 가능했을 텐데, 그날은 불똥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빠는 내가 일해서 벌어오는 돈이 고맙지 않아? 월급이 기쁘지 않아? 나는 힘들게 사람이랑 일에 치이면서 돈 번다고 애쓰는데, 왜 오빠는 아니야? 돈 버는 게 쉬운 것 같아?"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 게, 분명 후회할, 못난 짓인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도 가끔은 그냥 집에 있고 싶어. 낮에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오빠처럼 운동도 가고. 보기 싫은 사람 안 보고 그렇게 시간을 좀 보내고 싶어. 근데 난 안되잖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꾹 참고 했는데. 내가 돈 버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집안에 숨쉬기 힘든 침묵이 깔렸다. 집사가 작은 눈을 쉴 새 없이 깜박였다. 그 깜박거림을 따라 1분 같은 1초가 100번쯤 흘렀을까. 남편이 침묵을 걷어내며 말했다.
"나는 윤정이한테 항상 고마워"
고맙다는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는데, '고'자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윤정이의 노동을 한 번도 당연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단지, 월급날에 큰 의미 부여를 안 한 거야. 내가 특별히 '날'에 의미부여 안 하는 사람인 거 알잖아.
집사가 생일도, 기념일도 딱히 챙기지 않는 사람인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 수고를 누군가는 고마워해줬으면 좋겠는걸.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칭찬받고 싶은걸.
나는 펑펑 울었다. 지난 7년, 외로웠던 월급날의 기억들이 똘똘 뭉쳐 사정없이 마음을 굴렀다. 애써 묻어 두었던 서운함들이 물색없이 지뢰처럼 터졌다. 폭죽소리를 내며.
2024년 12월, 집사가 월급이 들어오기 하루 전부터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 내일 월급 들어오는 날이네! 파티해야지 파티!! 뭐 먹을까. 오랜만에 나가서 외식할까?"
한껏 높인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집안이 쩌렁쩌렁하게 외친다.
"이번 달도 고생!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드리옵니다 마님"
과장된 몸짓에 장난스러운 말투. 백 프로 만족은 아니지만, 일부러 노력하는 남편의 모습에 마음이 괜히 아릿하게 올라온다. 이후, 나의 월급날은 우리 부부가 챙기는 몇 안 되는 날 중 하나가 되었다. 대단한 선물도, 화려한 음식도 없지만, 서로 고생했다고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를 주고받는 시간들.
남편에게 따발총을 날렸던 날, 나는 조용히 설거지를 마무리하는 남편의 뒤에 갔다.
"오빠, 오빠도 집에서 힘들 텐데, 아까 너무 심하게 말했지?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월급도 없는, 주부로서의 삶을 사는 남편의 일상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보상도 없는 노동을 하는 당신에게, 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한 걸까.
나는, 어쩌면 나처럼 외로웠을, 집사의 당연함을 조용히 안았다. 보라색 앞치마를 두른 집사의 등이 뜨거웠다.
당연해 보이는 것들은 언제나 외롭다.
그래서 우리는 고맙다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