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정지 버튼을 누르다!
그날, 어쩌다 보니 회사에 출근해 있었다.
재택근무가 통용되던 때였는데…
그날따라 출근이 하고 싶었다.
마치 나의 퇴사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운명이 나를 회사로 이끌었나보다...
이날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커피도 한잔 했으며….
이제 막 업무를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러다 대표님과 눈이 마주쳤고,
잠시 커피를 마시자고 해서 회사 근처 카페에 앉았을 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아올랐다.
아!!! 이제 정말 퇴사를 해야하는구나…
대표님의 말은 전혀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어떻게든 열심히 버텨보려고 했건만,
그의 말은 가슴속에 비수처럼 꽂혔다.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내 회사인 것 마냥 정말 노력 많이 했다.
신입들이 들어오면 교육도 도맡아했다.
궂은 일이 있으면 뭐든 나서서 처리했다.
그 때문에 인정도 받았으나,
그뿐이었다!!!!!
나에게 기대하는 수준이 딱 그정도였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그날 오전….
나는 퇴사하겠다는 의사를 팀장님께 밝혔다.
아침에 인사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단지, 대표님과 대화를 나누고
그동안 가졌던 생각들이 확고해졌을 뿐…
아직 사직서를 제출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가족들 중 누구와도 논의하지 않았고,
마치 내 마음이 내게 선물하듯,
말이 그냥 툭 튀어나왔다.
잠시나마 머릿속이 복잡했다.
온갖 감정이 얽히고 설켜 있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정말 무너질 것 같다."
누구와 상의한 것도 아니었다.
아내에게 미리 말하지도 않았다.
그냥 즉흥적으로, 퇴사의 뜻을 팀장님에게 전했다.
어느 정도 짐작을 했었는지.
팀장님의 반응은 의연했다.
그동안 나의 모습이 참 위태로웠나보다.
말을 꺼내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겐 그 몇 초가 한 세월처럼 느껴졌다.
내 자리로 돌아와서 나는 처음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무언가를 끝냈다는 해방감,
나 자신을 겨우 붙잡았다는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그곳은 내가 11년 가까이 다닌 직장이었다.
처음 특허 업계로 전향한 후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었다.
수많은 명세서를 쓰고,
수많은 특허를 분석했다.
퇴근 후 밤을 새우며 기일을 맞췄고,
출장도 수도 없이 다녔다.
추석 연휴에도 일을 하거나,
마음 놓고 휴가를 길게 내본적도 없었다.
내 삶의 대부분을 그곳에 쏟아부은 셈이었다.
하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실적 압박은 매년 반복됐고,
마음속 골은 점점 깊어졌으며,
몸과 마음은 완전히 탈진해 있었다.
출퇴근길마다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고,
주말엔 침대에 누워서도 업무 관련 내용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일상이 너무도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퇴사를 전한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회사에 퇴사하겠다고 말했어."
아내는 놀란 눈치였지만, 한참을 듣고 난 뒤 이렇게 말했다.
"그래, 수고했어. 이젠 좀 쉬어도 돼."
그 말에 나는 솔직히 울컥했다.
나를 탓하지 않고, 내 결정을 존중해준 아내에게 고마웠다.
퇴사를 한다는 건 단순히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아니었다.
내 삶의 중심축 하나를 통째로 들어내는 일이었다.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불안도 있었다.
당장 생활비는 어떻게 해야 하지?
다음 직장은? 수입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만큼은 미래의 문제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느냐'는 질문이 더 절실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정말 언제 그만두어도 이상하지 않게 보였나보다.
다들 나의 고생을 인정이라도 해주듯이
잘 결정했다는 말이 나의 마음 한 곳을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듯 했다.
퇴사 이후, 며칠 동안은 마치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길고 긴 방학을 맞이한 것 같은 느낌….
하루 종일 집에 있고,
별다른 일정 없이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그 낯선 여유가 어색했고,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불안도 몰려왔다.
하지만 곧, 그 고요한 시간 속에서 조금씩 나를 회복해갔다.
출근을 하지 않는 아침,
아이의 얼굴을 보며 웃을 수 있었고,
지하철 대신 집 근처 공원을 걸을 수 있었으며,
동네 카페에 앉아,
컴퓨터 대신 책을 펼쳐 들 수 있었다.
나에게 퇴사는 끝이 아니라,
'정지 버튼'이었다.
너무 빠르게 달려오느라 잊고 있었던
내 마음의 소리를 듣기 위한 멈춤.
산책도 많이 했고,
책도 많이 읽었다.
내가 해야할 일들이 무엇인지…
또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시간이 계속 되었다.
그 멈춤 덕분에 나는 다시 살 수 있었다.
물론 그 후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퇴직금이 있었지만,
벌어들이는 수입없이 소비되는 숫자의 하락은
내가 감당하기 벅차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 결심이 없었다면, 나는 정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다음 화, 퇴사 후 마주한 허무함과 새로운 불안으로 엔잡러가 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