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죽음이 점점 우리 곁에 자주 머무는 것에 대한 단상>
'부고'
어느 때부터인가 결혼을 알리는 문자보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문자를 더 많이 받게 된다.
죽음의 기운이란 게 좋지만은 않은지라 왠지 싫었다.
어느 날은 옆자리에 앉은 윗 연배 선배에게,
"요새는 부고 문자가 결혼 문자보다 많이 오네요"라고 무심코 소리 내 말했다.
그 선배는
"그럴 나이가 됐지. 이제 시작이다"라고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답했다.
그 선배의 예언인지 경험담인지 모를 그 말은 사실이 되었다.
이제는 누군가의 죽음, 특히 우리 부모님 연세의 어른들이 돌아가셨다는 문자가 문자함에 가득하다.
죽음의 소식을 항상 전화 속에 가득 들고 다녀선지 이제는 무덤덤해지는 것 같다.
아직은 낯선 풍경의 먼 나라 이야기 같기만 해서 더 그렇겠지.
어제는 무척 쓸쓸한 죽음에 대해 들었다.
아내와 친하게 지내는 학부모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이번 죽음은 조금 특별했다. 그러니까 안 좋은 쪽으로 특별했다는 말이다.
사고사였다.
'사고사'라는 단어가 내 귀에 닿자마자 사고사를 당한 사람의 형체가 어떤 모습인지 빠르게 머리를 스쳤다.
사건기자를 오래 한 탓에 이런 죽음의 이미지는 내 머릿속 어딘가 데이터베이스에 꽉꽉 들어차 있다.
그런 이미지 하나쯤 떠올려 머릿속에 비추는 것은 TV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르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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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면에 든 남자의 아들은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었다.
아내와 딸은 항공사 주재원인 사위와 남편을 따라 4년째 중국에서 지냈다.
경찰이 연락선을 찾는 시간 동안 그는 쓸쓸하게 무연고자 영안실에 누워있었다.
꼬박 닷새가 걸려서야 경찰은 남자의 동생과 연락이 닿았다.
이역만리 땅에서 고모로부터 황망한 소식을 전해 들은 그의 딸은 경황없이 두 아이를 데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을 집어 들고 문 밖으로 나섰다.
집에... 아니 아버지에게 가려면 한국행 비행기 티켓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공항에 거짐 도착해서야 떠올랐다.
부랴부랴 남편에게 티켓을 예약해달라고 전화를 넣었다.
공항에서 일하는 사위는 간만에 자식 된 도리를 할 기회를 얻었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아들은 더 막막했다.
티켓을 최대한 빨리 구해 돌아와도 발인에 맞추기조차 빠듯했다.
그렇게 딸이 손주들과 먼저 병원에 도착했고, 경찰에게 그가 그라는 것을 확인해줬다.
싸늘할 대로 싸늘해진 그의 시신은 그렇게 가족들의 품에 겨우 안겼다.
너무나 큰 슬픔이 가족들을 덮쳐왔다.
딸은 자신이 몇 번을 울다가 실신했다는 것을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고모에게서 들어 알았다.
딸의 오른쪽 눈 주위가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은 황망하게 떠난 그를 추모하다가 가닐한 정신을 놓고 쓰러져 바닥에 부딪힌 탓이었다.
하지만, 딸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가끔 화장실 거울에 비치는 멍 자국을 보고서야 아주 미약하게 통증이 느껴졌을 뿐이다.
삶을 마치는 마지막 순간에 머나먼 곳에 있는 자식들과 아내를 떠올렸을 그를 생각하면 이런 통증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퍼런 멍자국은 거짓 같은 현실이 꿈이 아님을 증명해주는 제 살 꼬집기 같은 현실 증명서였다.
그는 아내가 딸을 따라 중국에 간 뒤 치매기가 있는 구순 노모와 살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왜 돌아오지 않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어쩌면 아들이 애초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를 찾지도 않았다.
이제는 딸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아니 자신만의 세계에 사는 어머니는 그런 것쯤은 상관없어 보였다.
딸이 오고 꼬박 하루가 더 지나서 아들이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비행기로 2시간 거리에 사는 딸보다는 만 하루, 날수로는 이틀이 늦었다.
상주가 없어 뭔가 허전하던 장례식장은 아들이 오면서 완정한 모습을 갖췄다.
식구들은 그와 똑 닮은 아들이 도착하자 고맙게도 다시 한번 그를 떠올리며 오열했다.
사흘간의 장례식은 거짓말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영안실에 누워 있던 시간까지 합치면 여드레니까 남들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그의 생전 바람대로 시신은 화장을 하기로 했다.
딸은 그가 가마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에서야 '화장하지 말걸'이란 생각이 들었다.
딸도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몰랐다.
혼자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을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 가장 컸으리라고만 짐작할 뿐이다.
몇 시간 후 세파에 깎여 쪼그라들었던 아버지는 더 작아져 유골함에 담겨 돌아왔다.
장례는 그렇게 끝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실감하는 가족은 아직 없었다.
아들은 다시 아르헨티나로, 딸과 아내는 중국으로 떠났다.
노모는 동생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신은 여전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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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듣고는 두 자식을 외국에 보내고 한국에서 각각 떨어져 홀로 생활하는 엄마와 아빠가 떠올랐다.
'그래. 살아계실 때 더 잘해야지'라는 다짐이 인스턴트커피같이 마음에 들었다가 여름 솔바람처럼 빠져나갔다.
오늘은 부모님에게 전화라도 한 통 해야겠다.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