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료시카 인형의 텔레파시


우리 집에는 오래된 마트료시카 인형이 있다. 러시아에서 온 마트료시카 인형이다. 러시아 방문이 쉽지 않았던 시절 친구가 일로 러시아를 방문했다가 들고 온 선물이다.


그간에 국내에서 봤던 마트료시카 인형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 외국에서 왔어”라고 느낄 만큼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면서도 조잡하지 않고, 그 나무와 나무 간극이 종이 한 장 차이처럼 아슬아슬하게 겹겹이 쌓이는 것이 신기하다. 정말 작디작은 그 나무인형에서 10개가 넘는 작은 인형들이 손오공의 분신술처럼 나오고 또 나오고, 볼 때마다 신기하다. 대충, 조잡하게 만들어진 마트료시카 인형은 3개 정도 나오는 걸 생각하면 더없이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마트료시카 인형이 나랑 다닌 지 어언 20년이 다되어 간다. 20년이라니….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우리 집의 장식장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어서 세월의 흐름도 잊은 채 같이 다녔다. 언제나 그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있기에 사실 신경 쓸 일이 별로 없었다.


오늘따라 아들놈이 유난히 눈에 거슬린다. 엄마의 직감인지, 여자의 직감인지, 평소보다 흥분한 아들이 영 못마땅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촐삭방뎅질로 사단을 낸다. 작년 겨울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다이소의 1000원짜리 스노볼을 잡으려다 나의 20년 산 마트료시카 인형이 파사삭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 몇 번을 주의를 주고 그렇게 손대지 말라고 이야기했는데도 불구하고... 더구나 이 장식장에는 올려놓지 말라고 했던 그 스노볼!! 결국 스노볼과 함께 나의 마트료시카 인형도 깨져버렸다. 그놈의 촐삭거림 때문에 순간의 빡침이 최고조에 달했다.

20200525_183104.jpg

러시아 인형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도 소리를 질렀지만 분이 풀리지 않는다. 우선 소리 한 번은 질러야 그나마 정신을 되돌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마저도 못하면 뚜껑이 더 열릴 것 같아서 샤우팅으로 허공에 힘을 빼 본다. 잔소리가 따발총처럼 쏟아져도 부족하지만, “너는 남의 자식이다”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혼미해진 정신줄을 다 잡아본다.


부엌일을 멈추고 깨진 마트료시카 인형 조각들을 찾아 헤맨다. 얇은 나무 조각들이 위치를 찾지 못해 한숨이 나왔다. 한참을 앉아서 깨진 조각들을 퍼즐처럼 맞췄다. 통으로 깎아 만든 그 마트료시카의 정교함에 항상 감탄하던 나이기에 이렇게 조각난 모양 사이사이를 접착제로 붙이는 마음이 엉망진창이다. 그나마 접착제로라도 그 깨진 조각들을 마음을 다해 붙여본다. 조각을 붙이는 사이 아까 보다는 마음이 가라앉는다. 하루 이틀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그런지 요새는 감정 근육이 좀 더 단단해진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한 타임만 환기가 되어도 조금은 야수 같은 성남이 사그라지는 느낌이다.


문득… 이 인형을 준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나랑 같이 20년을 지내다 보니 이미 마트료시카 인형으로 내 삶에 들어와 있었는데 이 인형을 선물해준 친구를 잊고 살았다. 중학교 친구인데 대학교,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간간히 만나고 연락도 하고 지냈는데 어느새 결혼과 육아를 하면서 삶에 치여서 친구들 챙기는 것도 잊고 지내고 있었다.


어떻게 지낼까? 마지막 만날 즈음엔 사람을 소개해줬는데 나의 좋은 의도와는 달리 나중에 알고 보니 좀 부족한 사람을 소개해준 것 같아서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그래서 맘이 상한 걸까? 해명하려고 여러 번 전화를 했는데 이상하게 통화가 안되어서 나를 피하는 줄 알고, 나 역시도 마음이 상했다. 웬만한 일로 오해하지 않는 편인데, 오래된 친구에게 해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것 같아서 우리 관계가 허무하게 느껴졌다. 기억의 파편들이 마트료시카의 나무 조각들을 이어 붙이는 것처럼 새록새록 떠올랐다.


잘 지내겠지? 결혼을 했다면 연락을 했겠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친구에게 연락을 안 한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생각에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깨져버린 마트료시카의 인형처럼 우리의 관계도 끝난 걸까? 용기 내어 전화해볼까 했지만 한동안 거절당했다고 느꼈던 마음 때문인지 선뜻 전화해보지 못하고 인형 조각들을 다 맞추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사람의 관계란 지속적으로 이어질 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아쉬움에 가슴에 먹먹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정말 기적같이…. 3일 정도 지나서 그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거의 5년째 연락이 안 되었는데…. 유학길에 올라서 중국에서 돌아왔다고 잘 지내고 있냐고…. 정말 기적 같았다. 아들의 촐삭방뎅질한 그날 나의 기억 소환이 그 친구에게 텔레파시를 보낸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나 혼자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니 그동안 그 친구에게 서운한 마음 가졌던 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렇게 또다시 우리 관계의 끈이 이어진 것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조만간 만나기로 했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는데 조금은 서먹하고 어색하겠지만 이 세월이 무색하게 중학교 친구로 돌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조금 설레기도 한다.

20200525_183134.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