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아저씨는 바퀴 달린 검은색 카트에 캠핑용품을 가득 담아왔다. 우리는 배정된 텐트에 돗자리를 깔고, 은색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버너 위에 올리고, 맥심커피믹스와 튀김우동 컵라면과 종이컵을 간이테이블에 놓아두고, 접이식 의자를 펼쳐놓았다. 왕냥크루 총무님이 일행을 데리고 나타났다. 한 분은 천막 앞에 걸어둘 왕냥크루 현수막을 직접 디자인해 왔다.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는 강아지(왕)와 고양이(냥) 그림은 귀여우면서도 엉뚱한 매력이 느껴졌다. 그린이의 감성이 반영된 듯했고 색감도 이뻤다. 카카오톡 이모티콘으로 나오면 사고 싶을 정도였는데 본인은 심심해서 그려봤다고 했다.
트랙 양쪽으로 설치된 천막이 80개는 넘는 것 같다. 천막마다 달리기 동호회 사람들로 가득했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의 동호회도 있고 이삼십대로 이뤄진 동호회도 있다. 사람들은 트랙을 가볍게 달리거나 체조를 하며 몸을 풀었다. 달리기 하는 사람들이 모두 숨죽이며 숨어있다가 '때가 왔다!'며 뛰쳐나온 것 같다. '나 달리기 좀 하는 사람이야'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많다. 볕에 그을린 날렵한 몸이 고무를 압축시킨 듯 단단하고 탄력 있어 보인다.
어떤 사람은 이 추운 날씨에 나시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다. 선글라스에 멋진 운동복을 맵시 있게 차려입은 사람도 있다. 웃통을 벗고 우람한 가슴근육을 드러낸 채 달리는 청년도 있다. 고가의 카본화를 신은 사람을 보며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흥, 저런 거 다 허세일뿐이야. 달리기를 운동화로 하나? 강백호를 봐. 실내화를 신고도 슬램덩크를 꽂았다고. 케냐 선수들을 봐. 맨발로 달리지만 일등은 늘 그 사람들 몫이라구!'
우리 단체의 이사님은 달리기동호회 활동을 했다. 내가 달리기를 한다는 걸 듣고 동호회가 단체로 대회에 참여하는 날 나를 초대해 주었다. 단체 국장님이 근무 하루 쉬고 다녀오라는 말도 해주셔서 마실 다녀온다는 마음으로 10킬로미터 대회에 참가신청을 했다.
뭘 하든 자기만의 이유가 뚜렷하면 만족감이 높다. 나는 오늘 왜 뛰는 걸까? 10킬로미터 대회는 이제까지 이미 두 번 뛰어봤고 기록단축에는 큰 관심이 없다. 다음 달에 울산에서 처음으로 하프마라톤을 뛰게 되는데 아직까지 본격적인 훈련을 안 하고 있다. 오늘 하프대회를 연습으로 삼아보면 어떨까? 안 해본 걸 해보면 몰랐던 세계를 마주하게 될 것 같아 조금 설렌다. 달리기 베테랑인 민 아저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프마라톤을 뛰어보기로 했다. 난 이따금 이렇게 충동적이고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릴 때가 있다.
운동화끈을 꽉 당겨서 고쳐 매고 하프마라톤에 참여하는 왕냥크루의 이십 대 청년 두 명을 따라갔다. 몸을 풀 겸 원형 경기장을 함께 달렸는데 젊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몸 푸는 달리기도 너무 빠르다. 수천의 인파 속에서 금세 두 청년을 놓쳐버렸다.
사람들이 팔각성냥갑에 빽빽하게 채워진 성냥처럼 주황색 트랙 위를 가득 메우고 있다. 짧은 반바지 차림의 선수들이 제자리 뛰기와 체조를 하며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린다. 하프는 뛰어본 적이 없어서 힘을 어떻게 배분하며 달려야 하는지 감이 하나도 없다. 주변을 둘러보며 페이스메이커를 찾는다. 가능하면 느리게 달리는 페이스메이커를 찾아야 한다. 1시간 50분은 절대 무리고, 2시간도 어려울 것 같다. '2:15'라고 표시된 헬륨풍선을 달고 있는 페이스메이커를 발견했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를 연발하며 사람들 틈을 헤치고 가서 페이스메이커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와아~'하는 함성과 함께 수천의 사람들이 우르르 출발선에서 쏟아져 나온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달려 나가니 단체로 게임을 하는 듯 흥분되고 신난다. 달리기 행렬이 하도 길어서 선두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사람들과 엉키지 않으려고 도로 오른편에 붙어서 달렸다.
사람들이 옆을 지나 앞으로 달려 나간다. 추월당할 때면 왠지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평정심을 유지하며 나만의 속도를 유지하려 했다. 20미터쯤 앞서가는 페이스메이커 병호씨를 의식하며 거리가 벌어지지 않도록 신경 쓴다. 내가 가장 멀리 달려본 거리는 12킬로미터 남짓이다. 절대로 무리해선 안된다. 병호씨가 사람들의 사기를 올리려고 큰 목소리로 파이팅을 유도할 때도 힘을 아끼려고 속삭이듯 '파이팅'을 했다. 날씨가 추워 자꾸 콧물이 나서 이따금 손수건으로 코를 풀며 달린다.
옆에 뛰는 사람이 나도 모르는 새 계속 바뀐다. 상고머리에 위아래로 흰색 운동복을 입은 해사한 청년이었다가, 조금 통통해 보이는 아저씨였다가, 피시방에서 게임하다 바로 나온 것 같은 검은 모자의 청년으로 바뀐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병호씨 등뒤에 매달린 헬륨풍선이 뒤에 있는 여성 얼굴을 퉁-퉁-하고 연거푸 두 번 쳤을 때 나도 모르게 풍부-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병호씨가 우리를 이끌어주며 천천히 달리고 있지만 아마 풀코스도 여러 번 완주해 본 실력자일 것이다.
이번 대회는 여느 대회보다 길가에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마을주민들은 선수들이 지나갈 때 장구와 꽹과리를 치고, 박수를 치고, 자기들끼리 오뎅탕을 안주삼아 막걸리도 마신다. 여덟 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박자에 맞춰 징을 친다. 나도 응원하는 주민들에게 손을 흔든다.
일 년 전쯤에는 매일같이 8-9킬로미터를 달렸는데 요즘에는 5-6킬로미터로 줄었다. 끝까지 달릴 수 있을지 불안하다. 한 시간 넘게 달려 10킬로 지점을 통과했다. 평소보다 천천히 뛰어서 아직까지 뛸만했지만 발바닥, 발목이 조금씩 아린 느낌이 나고 등허리에도 피로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까 4km쯤에서 300미터쯤 이어지는 언덕길을 오를 때 옆에 아저씨 둘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여기보다 12km 지점에서 나오는 언덕길이 훨씬 힘들다고. 오른편으로 꺾어진 길로 들어서자 어디까지 이어져있는지 모를 언덕길이 나타났다. 우리 무리는 인생의 고난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순교자들처럼 언덕길을 뛰어오르기 시작한다. 평지를 달릴 때보다 사람들의 호흡이 거칠어진다. 끄응, 끄응하는 신음이 주변에서 터져 나온다. 점차 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느려진다. 한참이나 올랐는데도 순교의 언덕길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속으로) 사람들에게 물었다. 우리는 왜 새벽같이 일어나서, 두 시간 차 타고 밀양까지 와서, 10킬로 넘게 달려와서는 이 기다란 언덕길까지 헉헉 괴로워하면서 오르는 것일까요? 다들 변태라서 그런 걸까요?
기이한 고통의 세계,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고통의 세계. 자기 의지로 뛰기 시작했고, 뛰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는데, 일단 뛰기 시작하면 힘들어도 멈추지 않는다. 달릴 거리가 한참이나 남았어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이전까지 달려온 거리가 있어서다.
사람은 어떻게 풀코스와 울트라마라톤처럼 긴 거리를 뛸 수 있는 걸까? 그건 42.195km, 100km 이렇게 뛸 거리가 정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막연하게 멀리 가겠단 마음으로는 이만큼 달리기 어려울 것이다. 목표점이 있으니 힘든 걸 참으면서 달릴 수 있는 거다. 지금은 결승점으로 부지런히 달려가는 중이지만, 평소의 나에게는 절실하게 뛰어 도달하고픈 목표가 아직 없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아무 목표나 정할 수도 없으니 일단은 내 마음을 잘 살펴볼 수밖에 없다.
나는 왜 달리는가? 이년 전쯤 폐가 안 좋아졌다. 하루종일 잔기침을 하고 한밤중에 기침하다 깨어 피를 뱉어내기도 했다. 2년 가까이 끈질기게 달리기를 해서 폐상태가 많이 나아졌고, 깡말랐던 몸에 살도 붙고, 체력도 좋아졌다. 건강이 나아진 지금도 이전처럼 건강이 나빠질까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 운동을 게을리했다가 예전처럼 아팠던 때로 돌아갈까 걱정이 된다.
이 걱정은 가만히 있으면 몸이 안 좋아진다는 걸 전제로 한다. 스스로가 약하고 아픈 사람이란 게 전제돼 있다. 십수 년 동안 '약하고 아픈'사람으로 지내와서 몸이 아픈 데 익숙하다. 나는 아픈 사람이기 때문에 아프지 않으려고 운동을 한다. 하지만 이것이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걸까? 스스로를 '아픈 사람'이라는 틀에 넣어서 보려는 게 아닐까? 건강이란 변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수년동안 아팠던 사람이면 계속 약하고 아파야 하나?
나는 더 이상 약하고 아프지 않은데도, 예전처럼 아팠던 때로 돌아갈까 두려워한다. 내가 십이 킬로를 달려와서 언덕길을 한참이나 뛰어오르고 있다는 자체가 내가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건강하단 걸 말해주지만 나는 스스로가 건강하지 않다고 믿어왔다.
생각의 흐름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폐가 안 좋아져 고생을 하다 운동을 꾸준히 해서 건강이 좋아졌다. => 운동을 안 하면 건강이 다시 나빠질 것이다. 나는 약하고 아픈 사람이다. => 약하고 아픈단 건 나의 기본값이다. => '약하고 아프다'는 전제는 바꿀 수 없다.
이런 논리구조에서는 아무리 몸이 건강해져도 스스로를 아픈 사람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몸이 나빠질 거란 불안을 안고 살게 된다. 같은 달리기라도 '아픈 사람이라' 달리기를 해야 하는 것과 '내 삶을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달리는 건 분명 다르다. 나는 결코 건강해질 수 없다고 믿으면서도 막연하게 건강해지기를 바라며 달리기를 이어왔다. 이 경우 몸이 아픈 것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스스로를 아픈 사람으로 선고하고 이 믿음을 바꿀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에 대해 다른 믿음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일단 스스로를 '아픈 사람'이라는 틀에 욱여넣고 있단 걸 명확히 인식할 것, '아픈 사람'이란 믿음이 내 삶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해 왔는지 살펴보는 것. '아픈 사람'이란 틀을 벗겨낸 나는 어떤 모습인지 찬찬히 살펴보는 것.
마침내 오르막길이 끝났다. 반환점을 도는 순간 오르막이 내리막으로 바뀌었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 한결 수월하다.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다. 언덕길을 올라오는 수백 명과 엇갈려서 내려간다. 하나같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씩씩대는 숨소리. 잠깐 전에 내가 짓고 있던 괴로운 표정. 수없이 보이는 힘든 얼굴들.
언덕길을 내려오자 병호씨가 말한다.
'이제부터는 평지만 남았습니다. 그냥 편하게 달려가면 됩니다. 2시간 15분에서 40초 여유 있습니다.'
병호씨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고, 시간 내에 들어갈 수 있으리란 기대도 생긴다. 탈수증상이 생길까 봐 급수대가 나왔을 때 물을 조금 마셨다. 배가 아플까 봐 머금은 물을 조금만 삼킨 뒤 뱉어냈다.
15킬로미터 팻말이 보인다. 옆에 여자가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 육 킬로나 더 가야 된단 말이야?'
아, 하프가 21킬로였구나. 20킬로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길게 달려본 적은 처음이다. 내 육체가 처음으로 마주해 보는 벽이다. 1시간 35분 넘게 달리고 있다. 추워서 감기 걸릴까 봐 내복바지를 입고 왔는데 땀이 나서 거추장스럽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얼굴과 목덜미에 쨍쨍한 햇볕이 고스란히 떨어진다.
신체부위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왼발목이 불편하다. 허벅지가 무겁게 느껴진다. 오른쪽 검지발가락이 아파오는데 발톱이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허리 쪽에 묵직한 피로감이 느껴진다. 여기저기 삐그덕 대는 지친 몸으로 어떻게든 완주를 해야 한다. 부서지기 쉬운 연두부를 젓가락으로 집을 때처럼 몸을 조심히 쓴다.
이제부턴 견디는 시간이다. 참아야 한다. 그만두기엔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여기서 그만둔다고 해도 어차피 결승점까지 걸어가야 할 거잖아? 계속 뛰는 수밖에 없다.
다시 급수대다. 종이컵에 반쯤 담긴 게토레이가 차갑고 달다. 4 등분된 초코파이는 집어먹지 않았다. 음료가 튈까 봐 마라톤 선수들처럼 멋지게 컵을 내던지진 못하고 아스팔트바닥에 조신하게 내려놓는다.
순간순간 힘든 걸 견디면서도 처음 참가하는 하프마라톤에서 이 정도까지 뛰고 있는 스스로가 대견하다. 나 엄청 건강해졌구나. 변기 앞에 쪼그려 앉아 기침하며 피를 뱉어낼 때도 있었는데, 숨이 차서 2분도 채 못 달릴 때도 있었는데 여기까지 왔구나. 매주 꾸준히 달려와서 이렇게 쫓아갈 수 있는 거야. 무릎관절이 상해서 달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는데. 오래 서있기만 해도 무릎이 아팠던 때가 있는데. 1시간 40분 넘게 달리고 있다.
후반부의 일 킬로미터는 정말 길다. 고통스러우면 시간이 길게 길게 늘어난다. 17킬로에서 18킬로 표지판이 보일 때까지 정말 한참이나 뛴 것 같다.
몸이 나사가 헐거워진 자전거 같다. 조금만 무리하면 나사가 팽그르 풀려나가며 털썩 쓰러져버릴 것 같다. 허벅지가 갈수록 무거워진다. 페이스메이커를 놓칠까 봐 조바심을 내며 따라간다.
다리에 쥐가 날까 봐 불안하다. 길가에 대기하고 있는 안전요원들에게 스프레이형 파스를 뿌려달라고 부탁한다. 내 옆에 뛰고 있는 사람들은 나랑 실력차가 크게 나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다. 헉, 헉 자신과 싸우고 있는 이들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다들 고통을 견뎌내느라 얼굴이 어느 정도씩 일그러져 있다.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건 내 앞을 보이는 허름한 잠바를 입은 어르신이다. 60대 중반은 돼 보이는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병호씨 등 뒤에 붙어 끈질기게 달리고 있다. 오랫동안 달리기를 꾸준하게 해 왔을 것이다.
19킬로미터. 교차로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물놀이패가 꽹과리랑 장구를 치며 선수들을 응원한다. 둥구당당둥구당당 쨍~ 둥구당당둥구당당 쨍~ 혼미한 의식으로 꽹과리 소리가 흘러들어온다. 사물놀이패를 지나서도 한참이나 머릿속에 꽹과리 소리의 여운이 우웅-- 하고 남아있다.
20킬로미터 지점을 지났다.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뛰는 내내 '할 수 있을까, 중간에 못 뛰게 되면 어쩌지' 걱정을 했는데 이십 킬로를 표지판을 보는 순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냥 가기만 하면 된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병호씨가 말한다. 이제는 다 할 수 있다고. 이제는 나를 따라올 필요 없고, 나를 앞질러서 힘 닫는 대로 가면 된다고. 지금부터는 힘 아끼지 말고 남아있는 힘을 다 써야 한다고. 그러면 다들 2시간 12분, 2시간 13분에 들어갈 수 있다고. 20킬로 지점을 절반쯤 지났을까. 나는 처음으로 병호씨보다 앞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물기를 꽉 짜낸 행주처럼 몸에서 힘이 거의 다 빠져나가버렸다. 한걸음 한걸음이 무겁다. 처음 출발했던 경기장이 보인다. 경기장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이다. 마음은 앞으로 달려가고 싶은데 몸이 나아가질 않는다. 정신없이 치고받던 복서들의 마지막 라운드처럼 언덕길을 오르는 다리가 후들거린다.
경기장 입구를 지나쳐 주황색 트랙으로 들어섰다.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경기장으로 뛰어들어가는 마라토너들은 참 벅찰 것 같다. 길게 달려온 길이 힘들었던 만큼 그 벅참이 클 것 같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결승점이 보인다. 몇 초라도 빨리 들어가겠다고 힘을 짜내 속도를 높여본다. 결승점을 지나쳤다. 고통을 참으며 길게 달려온 2시간 14분이 무색하게 달리기는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우와, 정말 하프를 뛰어버렸어! 충동적으로 뛰기로 결정한 건데 진짜 뛰어버렸어! 나는 풍선을 매달고 들어오는 병호씨에게 다가가 감사하다고 말했다. 병호씨 뒤를 쫓아오지 않았다면 완주하기도, 이 시간대에 들어오기도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마음은 성취감과 안도감과 기쁨이 뒤섞여 웅성데는데 몸은 막노동을 한 것처럼 온 데가 아파온다. 몸에 기뻐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 초췌한 얼굴로 절뚝거리면서 기념품을 받으러 간다. 마음 같아선 하프 기념메달을 받고 싶은데, 애초에 10킬로미터 참가신청을 해서 어쩔 수 없이 10킬로미터 기념품 배부 천막으로 갔다. 기다리던 담당자가 기념품봉지 두 개를 챙겨준다. 왜 두 개나 주지? 하나는 간식이고 하나는 기념품인가? 나중에 보니 밀양얼음골사과 한 개와 기념메달이 들어있는 똑같은 봉지 두 개였다. 아... 10킬로를 두 시간 넘게 걸려서 온 줄 알고 안돼보여서 두 개를 줬구나... 그래도 10킬로 메달이 두 개면 하프메달이나 마찬가지지 뭐...
사람들이 운동장 여기저기 쪼그려 앉아 두부김치와 어묵을 먹는다. 나도 줄을 서서 오뎅탕을 받아 우리 천막으로 돌아왔다. 오뎅국물을 한 모금 마신다. 뜨겁고 짭짤한 국물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뱃속에 따뜻해지고 정신이 번쩍 든다. 국물이 혈관을 타고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스며드는 것 같다. 최근 오 년 동안 먹어본 오뎅국물 중에 최고로 맛났다. 풀코스를 뛰고 어묵국물을 마시면 어떨지 조금 궁금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지쳤다. 집에 가서 샤워하고 쥐 죽은 듯 누워있는 것 말곤 아무것도 바라지도, 생각하고도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