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 자신을 던진 곳에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환영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지긋이 바라본 먼 곳에, 아니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항상 그 사람이 있던 순간이 그려졌다. 어렴풋이, 가끔은 현실보다도 선명하게, 오랜 시간을 몇 번이고 그려보았던 장면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씬이 펼쳐질 거란 환상을 그 누구도 쉽게 눈과 마음에 담을 수 없다. 그래서 켜켜이 쌓인 시간이, 그 사이 빈 공백으로 쌓인 정이 상상을 부추겼다. 언젠가 이 세세한 발자국이 미치도록 간지럽힐 것을 알고, 그 붉은 소양감을 견디지 못하고 마음에 딱지가 앉도록 긁어낼 것도 알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그 잔향을 걷어낼 길이 없어 자연스레 날숨처럼 내쉬었다.
“‘내가 좋아하는 선의 입술이 움직일 때 어떻게 맞닿을까, 부드럽다 못해 가녀리고 섬세한 말들만 또박또박 담아내는 저 숨이 닿으면 … 미쳐버리는 건 아닐까, 형체도 없이 녹아버리는 것이 맞다.’ 하염없이 말하고 있는 입술의 움직임만 쫓다가 제 볼과 목 근처에 닿은 손길에 먼저 무너져 내렸던 적이 있어요.”
감각이 나와 결별했다. 정신과 마음이 공기 중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오로지 손끝을 따라 모든 감각의 시선이 이동했다. 매일 넘기는 머리카락인데 그가 넘길 땐 숨이 함께 넘어갔고, 아득히, 과거의 환상과 현실의 온기가 엉켜서 영원히 환영이 되었다. 가끔은 꿈처럼, 종종 악몽처럼, 그 순간은 곁에서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그가 곁에 없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잔인하게도 그 순간은 숨소리조차 화면 속 자막처럼 뚜렷한 언어로 새겨진 듯 나날이 선명해졌다.
그 당시의 생생함보다 시간이 지나
곱씹을수록 짙어지는 순간들이 더 강렬해요.
구체적인 실존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뚜렷해지고 더 화사하게 피어오르는 온도는
충분히 환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랑은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라기보다는 감정에 가깝다 여겨지지만, ‘어떤 주어진 경험’으로 해석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 또한 갖춘다. 그 사람이 지은 표정 하나가, 입이 건넨 말 둘이, 사소한 행동이 건넨 세 가지 태도가 이미지나 오감으로 인식되고, 감정 이상의 무언가로 잔존한다. 화룡점정으로 여기에 가장 중요한 '감정'을 덧대는 순간, 모든 객관성이 주관성을 가진다. 지적으로 주어진 감각의 경험이 환영이 되는 순간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과정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