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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Oct 20. 2022

당신의 존재로 불리는 내 이름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라는

프롬의 말이 떠오르네요.”


짧지 않은 정적을 깨고 턱을   그가 이어 말했다.


“아까 소여 씨가 한 말 말이에요.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말할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자신도 사랑한다 말할  있어야 한다고 했죠.”


고르고 골라 당신인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당신일 수밖에 없던 마음의 연유는 이성적인 판단과 사고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애초부터 아니었다. 내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이 마음이 있었던 것처럼, 마치 만년은 더 된 깊이인 것처럼 둘의 영역으로 좁혀진 이 계절은 온 우주가 되어 있다. 프롬이 말했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랑하게 될 때, 서로의 실존으로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고.


기어코 내 존재가 당신의 실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고자 무릅쓴 사랑이 있다. ‘당신’이 지워진다. 대상이 사라지고 이 마음이, 내가 경험하는 나의 실존이 사랑 그 자체가 된다. 그를 내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 나는 그전에, 어쩌면 그 후에도 타인과 공유한 적 없는 영역으로 들어간다. 모든 것이 바뀐다. 우주가 뒤집어지고, 세상이 부서진다. 온 마음이 내 것이 아니게 된다. 부유하지도 못한다, 오로지 당신의 것이 된다. 통제력을 잃으면서 환희였던 합일이 나를 조각내는 고통이 된다. 인류의 오랜 습관이었던 고통과 슬픔으로부터의 회피가, 마치 어떠한 아픔도 없는 것이 사랑인 척 오해를 부른다. 나의 실존이 무너지고, 당신으로부터 내 이름을 분리한다.


사랑이 대상이 아닌  세상이었기 때문에

엘리오도 그렇게 힘들었겠죠?”


“저도 그 영화 생각하고 있었는데.”


치유를 희망하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

지불해야 하는 것이 하나의 세상을 잃는 것이라면,

차라리 아프고 간직해두는 것이

경제적인  아닐까요?”


영화 대사를 읊을 생각 때문이었을지,

아니면 경제적이라는 표현이 의외였던 것일지,

삐져나오는 웃음을 머금고 그가 다음 말을 이었다.


멀리하기엔 너무 아름답게 눈부시니까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은 
간직해둔 환희를 꺼내볼 일도 
없게 만드는 것이라 아까워요, 낭비죠.


고통을 당신의 이름으로 곱씹다가도 이내  사랑으로 다시 안을  있게 만들어준 영화  대사가,  이름으로 경험하고픈 당신의 실존에  걸음  가까이, 아픔과 눈물도 기꺼이 사랑이라고 부를  있게 만든다.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쉽게 아물고 쌓이는 마음이, 흉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하나로,  이름을 지웠다. 그런데 이젠 자꾸만  이름을 부르고 싶어진다, 당신의 존재로 실존하는  마음을 안아줄 준비가 되었다.


슬픈  낭비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받아들였던 아픔이
우리 간직할  있는
마지막 방법이라는 거죠.
홀로 남아있는 나를 안아줄  있는
유일한 위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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