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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Oct 18. 2022

보이지도, 읽히지도 않는 언어


혹시 영화 <블라인드>라고 알아요?”


눈먼  남자가 아름다워본  없던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내용이었죠? 미장센들이 워낙 아름다워서 기억하고 있어요.”

 영화를 떠올릴 
저절로 눈을 감게 돼요.

처음  영화를 보았을 , 잔혹동화 같은 비극의 처절한 사랑 이야기로만 느껴졌다. ‘얼마나 사랑했으면이란 탄복이랄까.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설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감각을 깨우는 작은 소리들. 부서지는 빛들. 바로 한 치 앞도   없는 당신이 그녀를 보기 위해 건네는 손길은 다른 이들의 손짓보다 얼마나  애타고 간절할까.  사랑을 보면서 잠시 내면의 실존을 읽고 어루만질  아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을 다시 들여다본 순간, 무언가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  걸음 물러섰다. 평범하지 않아 특별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세상이 없었다.


자신에 대한 사랑, 타인에 대한 사랑, 세상을 향한 사랑은 구분되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자체에 대한 사랑이 되어야  모든 사랑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타인을 사랑함으로 자신과 세상을 사랑할  있어야 정말로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할  있다고 조언하는 무수히 많은 철학이 도처에 있다. 그렇기에 타인만을 사랑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 행동, 특성이나 소유에 대한 사랑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미소, 목소리, 눈빛을 사랑한다면 그의 특성들이 사랑의 이유이며, 이유 없는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같다. 존재  자체로서의 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으로 구현된 사물을 사랑하듯 상대를 애정하는 것이다.


목소리를 따라 세상을 읽는다는 
무슨 느낌일까,
건네는  한마디 한마디가 모여
세상이 되고 빛이 된다는  무슨 의미일까,
여러  생각했어요.
그런데 생각할수록 무형의 이상만 커지고
타인의 존재는 희미해지더라고요.
나는 무얼 사랑하는 걸까,
 꿈만 같은 순간은 정말 
그저 꿈일 뿐이구나, 하는 느낌이요.


자신을 미지로 이끄는 그녀의 목소리는 아름다운 환영의 세계를 만들었고, 그는  세상을 눈먼 마음으로  힘을 다해 사랑했다. 자연스레  세상을 만든 목소리의 존재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볼품없는 외향을 경멸해 마지않는 여자는 사랑의 실존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을 향해 외쳐오는 사랑을 안고 싶어 스스로를 부정하며 아름다운 거짓을 고한다. 남녀가 서로를 실체 없는 사랑했다는 사실은  사이를 메우는 세상이 애초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사랑은 무언가를,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인 듯해요.
사실과는 다르더라도  사람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사랑했을 수도 있죠,
아예  사람으로부터 파생되지 않은 것을
사랑할  없으니까요.
물론 착각과 오해가 넘쳐나는 감정이지만요.
 ‘당신의 손끝에서  아름다웠어.’라는
대사가 그걸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생각해요.
내가 사랑하는 상대를 읽는 방식은
 달라요, 사람마다 상황마다.


동화를 믿지 않는다는 여자의 말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사랑은 애초에 동화 같은 힘을 가진, 보이지 않지만 손에 닿는 거리에 놓인 따스함이다. 애초부터 표면의 거짓들로 뒤덮인 존재라도 그녀를 손끝으로 알았던 사람에게  외의 것은 의미가 없다. 눈을 멀게 하는 사랑은 진실하고,  사랑은 영원하다. 사랑이 없는 세상의 아름다움은 의미가 없다. 사랑하던 사람이 읽어주던 책의 구절들이 만들어낸 환상이  현실적이고, 눈에 담기지 않던 아름다움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새삼 그가 영원히 담고자 했던 마음이 오히려 잃어야 얻을  있는 것이었다 생각하면,  용기의 깊이가 가늠조차 되지 않아서 끝없이 펼쳐진 눈밭처럼 먹먹한 풍경이 된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하얗게 웃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사랑은
읽히지 않는 언어의 느낌이에요.
익숙한 어둠에서 낯선 빛으로 나아가고,
조금이라도 읽고 싶은 마음에
손을 맞대고 향을 맡다
이내 입을 맞추어 본다는 .
환상을 봉하고 진정 나의 방식으로
당신을 알아가고 싶다는 거니까,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하려 입이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 손에 닿지 않거나 들리지 않거나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 스쳐 지나지 않고 지척에서 맴돌고 있다. 부재는 존재를  부각시키고, 멈출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시간을 붙잡는다. 애석하게도  많은 것이 존재하는 순간은 존재를 완전히 경험할  없을 때다. 이때 우리는  걸음  가까이 영원에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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