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글을 계속 쓰는 이유도 그래요.
‘우리’에 대한 기억일 수도, 소망일 수도,
처절함일 수도. 나에게 고함을 치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글쓰기에 대한 절박함은 잊히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서 온다. 어렴풋한 잔상만 떠도는 것을 두려워한다. 발자취 하나하나, 모양과 생김새 하나하나 또렷이 그림처럼 남기고 싶다. 글을 읽다 눈을 감아 내려가다 보면 선명하게 과거의 모습이, 그리워하던 온기가 눈앞에 그대로 펼쳐지는 것을 소망한다.
“소여 씨가 영화를 계속 보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요? 그리워하던 감정으로의 회귀
- 같은 거요.”
“맞아요,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와 달랐던 적이 거의 없어요.
미장센에 심취하는 이유도, 감각으로의 회상에
스며들기 좋은 OST를 매일 듣는 것도,
대사를 곱씹다 결국엔 직접 대사를 끄적여보는
이유도 늘 같아요.”
그렇게 사랑의 현상을 그대로 보관하고 싶다. 절박하게 모든 순간을 적어내려둔 글 자취를 보며 애틋하다. 당신과의 추억에 애틋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향한 마음이 바랠까, 선명한 색채로 남기겠다고 짓궂게 적어둔 글의 체취가 애틋하다. 스쳐 지났어야 할 순간들이 정류장처럼 팻말을 달고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이정표가 되어 있다. 그러면 나는 어지러운 마음을 붙잡고 한 곳 한 곳 지워져가던 시간을 다시 선명히 따라 그려간다. 말로만 읊조렸던 소양감이 올라오고, 믿을 수 없는 풍경들이 모인다. 오가는 대화 속에 생각의 섞임을 거치면서 식은 열기에 하나 둘 장작을 쌓고, 주변에 떨어진 재와 같은 오해들을 쌓인 눈 치우듯 훌훌 털어버린다. 그 빈틈으로 장난스러운 온기가, 열기에 가까운 온도가 메워진다.
기억 속 사랑에 빠졌던 모든 순간들이
애정의 밑바닥이 돼요. 그 바탕 없이 나는
잔존할 수 없어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또는 살아있지 않은 무언가가 돼요.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 헤매다 보면 그것이 과거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 비밀은 마음속 깊이, 반쯤은 닫힌 채로 늘 그곳에 있다. 인생은 모든 순간으로의 회귀다. 과거와 미래가 쳇바퀴 돌듯 연결되고, 당신으로 향해가는 순간 또한 기억 속 사랑의 잔여물을 그리워하는 것이 된다.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누구에게나 사랑의 기준이 되는, 존재의 출처와 같이 안정감을 주는 안온한 순간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곳엔 늘 당신이 있다.
“존재를 완성하는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을 못 견디는 거군요.”
“‘그리 오랜 시간 함께 했는데, 낯설어질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나를 이루는 시간들이
부정당하는 고통과 다를 게 없어요.
세상을 이루는 것이 우리 둘인 듯 착각하게 하던
시간이 뚝 끊기고, 서로가 완전한 타인이 되면서
마주칠 일조차 없어지면 난 그동안 무엇이었던 건가
길을 잃어요. 이 당혹스러움을 견디려면
멀어지는 풍경을, 희미해지는 감정을
붙잡아 와야 해요.”
“그렇게 하는 게 더 고통스럽지 않아요?
그 사랑이 뚜렷하고 선명할수록
감정을 제어하기 힘들 텐데.”
뚜렷함이… 확실함을 의미하진 않아요.
오히려 선명하기 때문에
날선 뜨거운 감정들을 멀리
식혀두고 보고 싶어지거든요,
가까이 있으면 데일 것만 같아서.
그렇게 한 걸음, 지난 풍경에서 떨어져 나와 지켜본다. 며칠은 달려들고 싶은 그림일 거다. 언제 저렇게 아름다운 색일 수 있을까, 무채색인 내가 붉어질 수 있을까 시간을 돌리고 싶은 마음 하나로 초침 분침을 엉망으로 헝클어트린다. 덕분에 해가 져도 잠들지 못했고, 해가 떠도 마음이 반쯤은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부유한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그림의 색감과 구도에 의문을 품고, 명백한 사실에도 질문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의미 없는 내면의 투쟁 끝에 아름다운 풍경에 칙칙한 안개를 만든다. 차라리 선명히 멀어지면 좋을 텐데 굳이 내 손으로 맑고 뜨거운 기억에 기어이 먹칠을 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의문은 그림을 벗어나 피사체의 근원에 닿는다. 오류를 찾기 시작한다. 마치 정답이나 대안이 있는 것처럼 바뀔 수 없는 풍경에 지적을 하다가 문득 이것도 하나의 시선과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든 감정과 선입견을 걷어내면, 뚜렷하게 그날의 풍경만 남는다. 켜켜이 쌓아올린 외로움이 반가움에 무너져 내렸던 날, 흔히 내려놓지 않는 나 자신을 무던히 던졌던 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그림일 거다. 결국 모든 풍경은 내 본연의 모습을 마주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고, 다른 모든 것은 부동하는 사실뿐이다. 그 순간을 한참 거울처럼 바라보다 영화 속 대사를 기록하듯 활자로 담아두고, 그다음 그림으로 넘어간다.
“잔존하는 열기를 한곳에 담아두고,
자신을 식히는 거네요. 그러면 그 순간을
잊지 않을 수도 있고, 본인의 마음을
외로움으로부터 지킬 수도 있는 거겠네요.”
“잘 지켜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가끔은 그 선명함에 밑도 끝도 없이
뛰어들고 싶어질 때도 있거든요.
기억이 왜곡된다는 것은 한없이 슬프면서도
황홀한 일이기도 해요.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처럼
‘기억’이라는 한계를 넘어서 자신도 모르게
특정한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다시 사랑에 빠지거든요.
전 그걸 제어하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시도해 본 적도 있잖아요?”
“그래서요, 그래서 더 그래요.
김선우 시인의 <목포항>에 보면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기를’이라는 구절이 있어요.
상대로부터 버림받을 자신은 있는데,
그런 나 자신을 지켜볼 자신은 없어요.
그래서 과거 속에 버림받는 나 자신만,
열렬히 사랑하는 나 자신만 몇 번을 되돌려 보고
실제로는 그 모든 가능성을 닫아버린 거죠.
지금 저에게 남은 것은 추억을 그대로 담아
먼발치 벽에 걸어둔 그림 몇 점 뿐이에요.”
사랑했던 시간들이 낯선 타인의 뒷모습이 된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허울이 ‘사랑’을 사랑하게 되는 빈틈이 된다. 그럼에도 이미 져버린 진솔한 우려 속에 다시 피어나는 열망이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당신에 대한 애착에서 상황과 흐름에 대한 애착으로, 멀어져 가고 있던 마음의 열기를 다시 끌어와 오늘 하루만 더 함께 잠들자고 꼬드겨 본다.
외로움은 두렵지 않은데,
외롭지 않았던 순간들을 잃는 것은
두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