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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렁뚱땅 미니멀라이프 2

백화점 면세점 좋.... 아합니다

by 랑랑 Mar 18. 2025

 사회초년생 때 회사 집 회사 집 회사 근처 밥집 술집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았다. 회사 책상엔 늘 일이 쌓여있었고 전화벨은 계속 울렸고 유선 전화기 선은 매일 꼬여있었다. 퇴근할 때 선배들이 꼬인 전화선을 다시 풀어주며 전화선 꼬이면 회사생활도 꼬인다며 힘내라고 밥 사주고 술도 사주던 시절. 재미있는 일은 없고 해야 하는데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을 꺼라며 이 일은 내가 죽어도 안 끝날 거야 자조하던 신입의 잔일. 집에선 잠자고 씻고 나오고를 반복하던 오늘 일은 내일의 나에게 밀어둬도 밀어두지 않아도 똑같이 많았던 업무. 그 와중에 잘하는 애들은 승진으로 치고 나가고 딴 데로 스카우트되고 유학 가고 여행 가고 나만 고인 물 되어가던. 


 그때 유일하게 스트레스 풀던 취미는 쇼핑이었다. 점심시간이면 회사 지하 에스컬레이터 2분 컷인  D면세점으로 가고, 격주 토요일근무 때면 L백화점에  놀러 갔다.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물건들. 친절한 설명 나의 소비를 정당하게 만들어주는 서비스와 독보적인 디스플레이. 구매하지 않아도 지속적인 아이쇼핑은 마음속 위시리스트를 만들어냈다. 원래 이쁘던 아이들 오래 보면 더 이쁘지 오래 보면 더 사랑스럽지 이번 시즌 지나면 못 보니까 더 갖고 싶지. 자연스레 욕망으 이어지는 그런 것 아니겠는가!!!! 백화점에서는 다 못 사니까 출장 가기 전이면 그것들 중 하나!! 친구의 출장 시에 부탁하며 둘!! 출장 가며 그냥 돌아오면 아쉬우니 셋!! 그렇게 숫자를 세어봅니다. 하나 둘셋넷 소소하게 14년간  오래 채우던 물욕. 출장 가서 회사에서 오는 전화를 안 받겠다는 의지만큼 깔끔하게 정리된 물욕의 흔적들은 카드 명세서로 남아있다. 물욕이 그리 크지 않아 혹은 금액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가방을 안 산 20대의 내가 안쓰럽기도 하고 그때라도 질렀어야지 답답하기도 했다가,  여초회사 출퇴근 시 위아래 오른손 왼손 모두 스캔이 가능한 곳에서 적당히 눈감았다 떴다 살아온 단단했던 내가 부럽기도 하다.


   출산휴가 복직하고 보직이 바뀌면서 세일즈를 다녔다. 차가 없으니 교통편 그나마 편한 백화점 내 거래처가 다 내 차지가 되었는데 그날따라 뭔가가 수틀린 날이었나... 회사에서 깨지고 나와서 눈에 독기가 서렸나.. 이 디자이너는 이런 색 이런 질감을 만들었을까? 왜 로고를 이렇게 쓰니? 하는 실망감이 들었다. 나도 타인도 안 사가면 이 물건들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월에 이월에 이월로 떠돌다가 대륙을 건너 아프리카에 의류산맥에서 검은 연기의 일원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한 달 한 달 찍히는 사이버 캐시보다 높은 금액의 물건. 선택받지 못하는 것들의 미래엔 죄의식 없이 일단 만들고 놓고 판매하는 자본주의 사회. 구매에 제한이 없고 그것을 구매하게 되는 것만으로 증명이 되는 부의 계단. 이런저런 생각들로 스멀스멀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공기청정기가 돌아가고 있고 좋은 향 가득하고 반짝이는 바닥의 백화점에서 토할 수는 없지. 침착하게 걷고 거래처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웃고 떠들고 돌아왔는데 그다음부터는 이쁜 것들 사이에 못난이들 보면 그렇게 가슴이 아프다. 넌 신상품을 위한 보조제구나 누군가 널  선택하지 않으면 낙오보다 더하는구나 어떻게 해야 어날지 모르는 나 같구나.


 여전히 백화점에 간다. 포인트도 쓰러 가고 선물 받은 상품권도 쓰러 간다. 20년도 더 된 위시리스트 브롬톤 자전거도 펴달라고 하고, 샤넬 짭인 줄 알았던 그러나 이젠 이쁘다 생각하는 셀린느 버킷도 보여달라 하고, 버킷을 들고 있는 나를 거울로 바라보고 오기도 한다. 뭘 사는 날 보다 사지 않고 식당가에서 배 채우고 돌아오는 날이 더 많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오늘 본 수많은 쇼룸을 머릿속으로 되짚어본다. 이월로 가는 물건들의 미래도 여전히 상상해 본다. 사고 싶음과 보류하고 싶은 마음도 들여다본다. 내 것이 아니라고 씁쓸하게 웃어도 본다. 넓은 쇼룸을 내 집 공간에도 구현하고 싶은 마음도 들여다본다. 내 집도 넓은 공간에 반짝였으면 좋겠다. 집에 가면 청소를 하고 침대에 이불을 각 잡는다. 장롱을 열고 옷을 정리한다. 모든 공간과 장 안에 물건을 7 여백은 3으로 둔다.  나를 위해 쓸고 닦고 또 바라본다.  그래서 백화점에 간다. 물욕이 이기면 어쩌나 싶지만 그래도 백화점을 돌며 요만큼의 다짐을 하러 간다. 나를 귀하게 여기는 청소하기 좋은 봄 날이다. 살랑살랑 S/S 신상품 쇼핑하기 좋은 봄 날이다. 신난다. 어찌 되었건 또 아름다운 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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