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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렁뚱땅 미니멀라이프 1

미니멀이라 하기엔 뭐든 많다 그래서 얼렁뚱땅..

by 랑랑

소비에 약하다. 물건을 사기 위해 결정하는 시간이 길다. 심사숙고한 탓인지 성격 탓인지 한 번 구입한 것은 오래 사용한다. 물건에 시간이 담기고 감정이 담겨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을 구매할 때 죄책감을 느낀다. 또다시 심사숙고하게 된다. 그래서 비우는 과정이 쉽진 않았다. 정리컨설턴트처럼 러브하우스처럼 후다닥 비포와 애프터면 좋으련만 살아가며 하루하루 비우는 건 혼자 하는 다이어트 같다. 재미없고 지루하고 현타 오고 조금은 씁쓸한 비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미니멀에 입문하고 처음 한 달 하루하루 비워내는 것은 쉬웠다. 소비에 심사숙고한다는 말이 무색하게 쓰레기가 내 방에 있었다. 유통기한 지난 화장품, 부러진 팬슬, 새로 산 옷의 라벨 단추 같은 것, 신발박스, 냉장고 속 화석 그리고 일회용 반찬용기, 포장비닐 등등. 어느 날은 10L 종량제 봉투를 들고 한 공간에 그것들을 꽉 채우기도 했다. 조금 창피했지만 쉽고 편하고 뿌듯했다.


백일여가 지나자 더 이상 버릴 물건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버릴 것이 없다. 물건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옷을 보면 그때의 추억들이 줄줄이 따라 나왔다. 또 어떤 옷들은 살을 빼면 입을 수 있지 않을까 미련이 따라 나왔다. 아이들 물건도 그러했다. 언젠가는 쓸까 입을까 읽을까 할까 싶어서 몇 번을 망설였다. 감정과 물건을 분리해 보려고 노력했다. 상자를 뒀다. 1년이 지나도록 안 찾으면 기부하자 마음먹었다. 결국 그 상자들은 1년 동안 조용히 잠들어 있다가 기부처로 보내졌다. 일부는 지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6개월 여부터는 생활이 단순해졌다. 벽도 바닥도 훤히 보이는 공간이 생기고 냉장고의 크기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적당한 음식이 들어있었고 라벨링 하지 않아도 음식물이 어느 정도 파악되었다. 내 안목이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물건들도 있지만 굳이 버리고 새 물건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새것엔 돈과 시간과 노력이 든다. 둔탁하지만 오래된 것들은 이미 나와 시간과 시간을 두고 유형의 지인이 되어간다. 어린 시절 촌티나는, 투박한 혹은 때 묻지 않은 그때 나를 만든 아이들. 그것들이 아직 내 곁에 남아서 나를 보는 것 같다.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확신 없는 선택들은 헤어짐이 없으니 이렇게 길고 지루하게 이어져서 굳이 필담으로 험담하는 날까지 오도록 오래 보는구나. 어찌 되었건 그렇게 나도 나이를 먹어가고 물건도 시간을 보내어간다. 이 인연이 다하고 나면 새로운 선택할 때는 안목이 깊어질까? 나는 나이 들어가면서 어떤 모습일까? 쓸모와 목적을 다한다는 건 어디까지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던 것 같다. 생활이 단순해지는 만큼 생각도 단순해졌으면 좋겠다 꿈꾸던 그때. 아직도 생각은 딱 그만큼인 지금.


1년 여 지나가자 꼭 필요한 것들만 남게 되었다. 집 어느 공간을 바라보아도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했고 안정 적여 보였는데 어느 날 이사를 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이사. 작아진 평수. 커가는 아이들.

도면을 놓고 가져갈 짐과 새로 구입할 가구와 온갖 것들을 시뮬레이션해 본다. 여기 내 아이들을 모두 가져갈 수 없다. 또 비운다. 비워내며 이사했건만 새 집에서 자리잡지 못한 아이들은 또 비워진다. 필요한 것들이었는데 막상 비우고 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더 간소해진 짐. 물건에 자리를 지정하면 집은 한껏 더 단순해지면서 편하고 이뻐진다. 매일매일 눈뜨면 빈 벽에 반짝반짝 볕이 들어오고 나가고 바람이 머물고 어둠이 깔린다. 4인가구 살기엔 좁았지만 내 손이 너무 많이 가서 늘 그리운 집.


우여곡절 끝에 직전 집보다는 조금 넓어진 여기로 이사를 하며 미니멀이라고 하기엔 짐이 다양하게 많음을 느낀다. 그냥 타인이 보면 이게 무슨 미니멀이야 그냥 깔끔하게 사는 정도네라고 할 정도로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 무선청소기, 각종 밀대 및 가습기, 제습기, 에어프라이기, 전자레인지, 냉동고, 김치냉장고 없는 거 빼고 다 있다. 내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들과 결별할 수 없어서 다 끌어안고 산다. 김치냉장고와 냉동고도 적당한 크기로 있어서 쟁이는 것도 잘한다. 적립금과 쿠폰의 노예로 사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생필품 류도 되도록이면 다 소비한 후 사려고 노력하나 적립금과 핫딜 쿠폰이 주어지면 고민만 백만 스물두 번 하고 쟁여둔다. 결국 산다는 이야기.ㅋ

4 가족. 이제 더 이상 내가 잔소리한다고 해서 대청소를 한다고 해서 가족들의 짐을 줄이는 건 쉽지 않다. 모두 각자의 것들이 소중하고 나도 많은 시행착오 끝에 비워내라는 독촉이 일종의 폭력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스스로 해내는 것이 맞다. 내가 쓰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내 것을 잘 사용하려 노력한다. 다행인 건 아이들이 찾아주세요 하지 않는다. 모두 다 아는 자리에 숨 쉬고 있다. 모두 다 제자리에서 반짝여주는 내 삶의 동반자들.

깔끔하고 비싸고 고급지면서 단순한 미니멀인테리어를 보면 아직도 그렇게 현타가 온다. 나도 눈이 있어서 좋은 거 보면 부럽다. 매우 부럽다. 이번생은 글렀구나 자조 섞인 한숨까지 나온다. 현타 뒤에는 집에 칩거하며 또 그렇게 하루 종일 내 낡고 허름한 취향들을 바라본다. 그러면 또 그렇게 애틋해진다. 자주 보면 사랑스러워진다는 시인의 말이 옳다. 존재만으로도 고맙고 고마움은 소중함으로 소중함은 사랑스러움으로 커져간다. 그 작은 하나하나 큰 하나하나도 있는 그대로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내일 또 누군가의 집을 보며 부러워하겠지만.. 얼렁뚱땅 미니멀리스트로 사는 엉성한 나로 그럭저럭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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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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