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만보를 깨워주세요
포켓몬스터 중에 잠만보라는 캐릭터가 있다. 하루 종일 잠을 잘 수도 있는 초록초록한 거대 생명체이다. 포켓몬스터들이 저마다 자기를 보호하는 공격기술을 탑재하고 있는데 잠만보는 그런 게 없다. 그저 잔다. 잔다. 자서 길을 막는다. 닌텐도 스위치 게임에서도 잠만보는 늘 잔다. 졸리면 아무 곳에서나 잔다. 몸집이 커서 길을 막는다. 이 길을 넘어가려면 잠만보를 깨워야 한다. 잠만보를 깨우려 공격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피카츄의 백만볼트도 무의미하다. 피리가 필요하다. 어느 맵에 있는 것일까? 그 피리는 어디 있지? 아이들은 피리를 찾으러 가는 힌트를 구하려고 여행을 다시 떠나지 않는다. 블로거나 유튜버 혹은 먼저 그 게임을 깬 친구들에게 물어본다. 모험의 세계는 선행자에게 구하는 해답이 세상 쉽고 세상 편하다.
잠은 삶과 분리된 듯 하지만 삶에 지분이 높다. 잠의 양 차이일 뿐이지 안 자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수면의 질은 수면 후의 삶의 질을 좌지우지한다. 수면의 질은 오감 능력을 꺼트리고 오로지 미세한 내부장기의 흐름과 호흡이 주도한다. 매일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어느 책의 글귀도 있었다. 나는 매일 안전함을 시험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전하게 잠들기 위해 사는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지금 완벽한 옷차림과 침구와 그리고 집이 있다. 김주환 교수님은 삶은 잠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교수님 말씀이 맞는 듯하다. 몸의 메인 시스템이 꺼져도 계속해서 이뤄지는 호흡을 생각하면 우리 몸은 잠을 위해 움직이는 것 같다. 잠들기 전에 오늘을 보고 어제를 보고 내일을 바라보는다는 것. 명상과 잠은 소중하다.
잠을 잘 자는 사람을 알고 있다. 성인인데 신생아처럼 잔다. 먹고 잔다. 운전하고 잔다. 책 보다 잔다. 등 댈 곳이 있으면 어디서든 잔다. 심심하면 잔다. 싸우고도 잔다. 낮에 자도 저녁에 또 잘잔다. 그냥도 잘 잔다. 예전엔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잠을 자기 위해 사는 사람을 만났다. 먼저 알려줬다면 참 좋았을 텐데 잠을 포기하는 1년 남짓 연애 기간 동안 그 위대함을 위대함으로 알아차리지 못한 내가 있다. 그 노력과 열정을 그저 평범한 사랑으로 보았으니 참 미안하다. 이젠 잠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내 몫이구나 생각한다. 참 늦게 깨달았다.
잠을 잘 자는 편이었다. 잠탱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지금은 그때 잘 잔 내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때 잘 먹고 잘 자고 생각은 많았던 내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금은 2호기가 발길질해서 깬다. 1호기가 옆에서 이불을 말아서 깬다. 신랑이 코를 골아서 깬다. 또 어느 날은 혼자 있어서 깬다. 성인의 수면을 위해 각방을 쓴다는데 어렴풋이 이해가 되다가도 한편으론 이해할 수가 없다. 잠이란 누군가 때문에 깰 수도 있고 깨서 화낼 수도 있는 것이다. 깨서 아무것도 없는 핸드폰을 열어볼 수도 있고 의미 없이 시간을 보기도 하고 우주를 그리워도 하고 양을 세기도 하는 것이 잠이다. 그리고 자면서 이 모든 뒤척임을 알게 모르게 공유하는 것이 잠이다.
아침에 하는 침구 정리는 저녁 전엔 침대에 누워있지 않는다는 약속인데 오늘따라 몸은 무겁고 나는 누워있고 누워서 생각을 정리해 본다. 잔다. 잔다. 그리고 누워만 있는다. 민트색 이불을 거대 잠만보 코스프레라 생각하고 누워있다. 내 안의 피카츄가 백만볼트로 공격하는데 포근한 침구에 타격받지 않는 척하고 있다. 아니다. 나는 지금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이다. 공주는 사람이고 안깨고 살 수 없다. 사실 운동도 하고 씻기도 하고 매일 에스테틱도 하고 옷도 갈아입을 것이다. 못 이긴척 맛난 음식도 먹으며 이쁘게 누워 때를 기다리는 회피형 공주님. 나는 깜도 되지 않으면서 내 안에서 공주를 발견한다. 운명처럼 백마 탄 양질의 일은 언제 도착할 것인가? 인생을 열심히 사는 너에게 무임승차 하는 기분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는 움직이지 않고 어디에 기대어 이렇게 편안한 인생을 복잡하고 난해하게 받아들이며 사는 걸까? 잠자는 숲 속의 엄마는 고민한다. 누구도 시키지도 않은 고민을 혼자서 버겁게 버겁게 받아들이며 산다. 나는 공주도 아니지. 그냥 회피형 여자. 회피형 아줌마. 그럼 잠만보를 깨워보자. 피리를 구해야 한다. 만파식적도 아니고 피리는 어디서 구할 것인가? 피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떤 소리가 나를 일으킬 것인가?
저녁 시간이다. 조금 있으면 아이들이 중문을 열고 [엄마! 오늘 저녁은 뭐야?]라고 물어올 것이다. 밥을 하자. 밥에 반찬을 하자. 잠자는 거 다음은 먹는 것이다! 먹고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일단 먹고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