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걷다

좋아하는 것 1

by 랑랑

화면과 제자리를 깜빡이는 커서와 조용한 키보드와 그 위에 갈 곳 잃은 내 손가락. 내 안에 것들 거의 다 파낸 거 같은 기분.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을 거 같은 불안감이 들 때 나는 걸으러 나간다.


걷다.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아장아장 터덜터덜 종종종 쾅쾅 쿵쿵 콩콩 사뿐사뿐 타박타박 터벅터벅 느릿느릿 후다다닥 깡충 어그적 어그적 비틀비틀.. 의성어 의태어가 함께해도 이쁘고

함께 같이 아빠랑 엄마랑 아가랑 사람이 와도 좋고

도란도란 다정하게 손잡고 나란히 마주 보며 행동이 와도 좋다

다리랑 당연히 어울린다

활기차게 씩씩하게 즐겁게 행복하게 가뿐하게 설레게 가 함께하면 시작 같아서 웃게 되고

혼자 홀로 울며 쓸쓸하게 한도 없이* 외로움이 오면 뭉클하다

가방 짐 선물 물건이 와도 무게와 상황이 그려지고

버겁게 힘들게 아파서 아파도 가 오면 위로하고프고

숲길 강가 산책로 등산로 바닷가 길이 와도 좋고

바람 햇볕 비 눈 배경이 와도 좋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아침 점심 저녁 늦은 밤 이른 아침 시간이 와도 좋다

아무 데나 정처 없이 그저 길 아닌 곳도 용기가 되고

저기로 저기까지 목적과 방향과 의도가 있으면 기운이 난다

그냥 그저 목적과 의도가 없어도 마냥 좋다


걷자! 걸을래?

나는 할 말이 많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좋은 풍경과 날씨를 같이 느끼고 싶어서 이기도 했다. 때론 흐린 날도 추운 날도 있었다. 의무감인 날도 있었고 어색함을 감추고 싶어서 걷자고 하기도 했다. 살 빼겠다며 의욕이 넘치는 날도 있었다. 무료한 시간을 없애려는 마음도 있었다. 어떤 날은 걷는 만큼 함께 하고 싶기도 했다. 내가 하는 몇 안되는 제안이다. 걷자구!!


걷자! 걸을래?

내게 물어온다. 속내를 알 수 없어도 좋다고 대답할 수 있다. 할 말. 하기 어려운 말을 숨겨놓고 있어도 좋다. 분위기 좋은 공간 좋은 음악이 있어도 앉아서 듣는 숨긴 날 선 어려운 이야기는 힘이 들지만 걸으면서 듣는다면 다 이해할 수 있다. 같이 걷기 피곤하고 지치고 버겁고 힘들고 무겁고 두려운 날들도 있지만 발걸음 하나하나에 떨궈버렸던 걸까? 그 지친 피곤한 부정적인 모든 감정 위로 걷는다. 숨을 쉬면서 하는 다른 행위를 멀티태스킹이라고 하지 않듯이 걷는 행위도 그러한 것 같다. 다른 행위와는 다르게 위에 그 순간의 여러 감정과 언어와 행동이 남는다. 그렇게 남는다. 더러는 기억되지 않기도 하지만 수많은 걸음걸음들이 기억난다. 그래서 내가 가진 언어 중 가장 긍정적인 화답을 한다. 그래!! 좋아!!

모니터와 수 분째 눈을 마주하니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멈추었다. 아직 엉덩이도 다리도 무겁지만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아이들의 등교시간이 끝난 인도는 한적하다. 볕은 벌써 봄날이고 자동차의 소리는 요란하다. 걷다 보면 그냥 지나치던 것들이 보인다. 봄날에 어색한 낙엽도 보이고 구석구석 쓰레기도 보이고 빼꼼히 초록초록한 아이들도 보인다. 목적 없는 걸음에 바람과 볕과 의미 없는 소리들이 귓가에 머물다가 떠난다. 걸으면서 생각하기도 하고 생각이 없기도 하다. 아직은 아무것도 없는 땅을 지나가는 개미를 흐르는 물을 보기도 하고 하늘을 산의 능선을 보기도 한다. 아직도 물가에 남은 이름 모를 새들을 바라보며 글감을 생각했다가 새가 날아오르자 글감도 파사삭 날아올랐다.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생각하기도 한다. 아 이렇게 걸어선 운동도 안 되겠네 핸드폰의 만보기를 보기도 한다. 집에서 들고 나온 물을 마시고 잠깐 의자에 앉기도 하고 핸드폰도 한번 들여다 보고 어슬렁어슬렁 동네 한량이 되어본다.


다리가 뻐근하다. 아직 마중물만큼의 양을 걷지 못했나 보다 무언가 채워진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그래도 걷는다. 잠시 앉아서 쑥도 보고 냉이도 보았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뛰는 사람, 강아지와 누군가와 같이 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이 시간에 낚싯대를 드려놓은 사람도 커피를 들고 풍선을 들고 가는 사람들도 본다. 봄에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 귀에 무선이어폰을 꽂아본다. 조금은 차갑지만 살랑거림 간질간질함도 느껴본다. 저 멀리 나는 새도 보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들도 본다. 멀리 기차가 지나가고 둑길로 차들도 지나간다. 강가를 바라보는 아파트 뷰를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도 해보고 환한 대낮에 불 켜진 아파트를 보며 저 속의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 무엇을 할까 상상도 해본다. 아직은 이 먹먹한 초 봄을 깨워내려는 나무의 생명력도 느껴본다. 내 머리는 바쁘고 내 눈은 부산하고 내 호흡은 조금씩 가빠지고 내 손은 사진 찍고 단어를 주워내고 차가워지고 투덜거리는데 내 다리는 그저 걷는다.


방향을 바꿔 걷는다. 나의 걸음은 집을 향해 가벼워진다. 아까 보던 풍경이 반대가 된다. 등이 따뜻하고 목 뒤편에 바람이 느껴지고 작은 물병은 더 가벼워졌다. 내 머리는 생각이 없다 내 눈은 아직도 두리번거리며 내 호흡은 가쁘고 손은 자포자기한데 내 다리는 마냥 걷는다. 걷는다. 걷는다. 집과 점점 가까워오는데 글은 여전히 나올 기미가 없다. 그래도 걷는다. 그래서 좋아한다. 의미가 있어도 목적이 있어도 얻어도 얻지 못해도 피곤해도...

보글보글거리는 따뜻한 물에 담가진 고운 내 두 발을 오래 바라본다. 고맙다. 걸어줘서 고맙다.



*한도 없이

서태지와 아이들 3집 [널 지우려해] 가사

한도 없이 걷다 보면 너를 잊을 수 있을 거 같아.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02화얼렁뚱땅 미니멀라이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