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이사 후에 전에 살던 집을 지나치는 경우가 왕왕 있었는데 그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재개발이 들어가서 형체도 동네 모양도 달라져서 여기 정말 살았었나 어색하기도 했고, 예전 마음에 뭉클했지만 밖에서 살짝 보이는 안의 풍경에 낯설기도 했다. 집이라는 공간이 누가 사느냐에 따라서 분위기도 공기도 풍경도 다르니까 당연한데 말이다. 나도 등기부등본에 내 전에 사셨던 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꼼꼼한 입주청소부터 내 살림으로 채우며 빨리 익숙해지길 빨리 친숙해지길 바라면서 과거의 내 공간엔 내 결이 남아있길 바라다니.. 놀부심보는 여전하다.
놀부심보가 가능한 건 친정집 때문인 것도 같다. 내가 최장기간 살았던 집이자 아직도 내 물건이 약간 남아있고 언제라도 소유권과 추억권을 소환하며 방문해도 아무런 거리낌 없는 엄마빠가 살고 계신 친정집이다.
썩 잘 지어진 집이 아니어서 꽤 오랫동안 수리에 수리를 거듭하며 살았다. 비가 세기도 했고 전기가 떨어지기도 했고 단독이라 겨울이면 정말 추워서 수도가 얼기 다반사였다. 그전 집들도 수리 또 수리를 해오며 살았지만 20대 초반에 만난 이 집은 일종의 드림 하우스였다. 그때는 왠지 비포애프터 훅훅 바꿀 수 있는 최적의 집이 내 앞에 있다고 생각되었고 의욕도 돈도 깡도 넘쳤다. 지금처럼 핀터레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내 스타일의 인테리어를 보면 캡처하고 저장해 놓고 따라 하고 싶은 것들을 즐겨찾기 해두고 그러면서 조금씩 취향도 바뀌고 직접 선호도도 생기고 그랬더랬다. 중요한 건 리폼 및 인테리어를 하려니 생각보다 쉽게 짠하고 바뀌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노동과 기술력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구나 느꼈고 인테리어 하시는 분들의 기술에 참 깊은 감명도 받았다. 실제 문 한 짝 리폼도 버거워서 3일씩 걸리고도 완성도는 참 형편없었고 도배도 광폭 소폭 도배지 모두 어려워서 A3형태의 풀발린 도배지로 더덕더덕 붙여낸 좁은 거실. 도배하고 며칠 힘들어 몸져누워있었다. 그때 유리씨 우연수집 김반장을 참 부러워했고 그래서 뚝딱뚝딱 손재주 좋은 남자 만나야지 했는데 그러진 못했고. 뭐 그렇다는 얘기다.
이 집은 옥탑 같은 4층이 있는데 사방에 창문이 있어서 봄가을 저녁에 정말 시원하고 좋았다. 여름에 무덥고 겨울에 얼어 죽을 거 같단 진부한 설명을 더해도 봄가을엔 정말 좋았다.
오래 산 집인데 평수는 좁아서 실제 엄마아빠와 살기보다는 동생과 단 둘이 자취방처럼 살았다. 엄마빠가 반찬 날라주면 밥이랑 챙겨 먹고 둘이 청소하고 치우고 살림살이 정리하고 싸우고 투닥거리고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급하게 동생을 불러서 동생이 놀라 내려오면 불 끄고 가 달라고 하는 장난이나 서로 향한 수많은 디스로 언어 영역과 새로운 가족관계를 개척해 냈다. 같은 집에 살고 있었기에 동생이 타인으로부터 받는 평가와 싫은 소리를 직접 듣거나 걸러서 들을 수 있었고 그래서 미워함과는 별개로 안쓰럽고 내가 편이 되어주고 싶고 아끼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같이 산다는 것은 그런 것 같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열쇠로 문을 여닫았는데 문 앞 화분 아래 혹은 선반 아래에 키가 있었고 이렇게 쉬운 숨김에도 도둑 한번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엄마빠가 불편하셔서 번호키로 바꾼 지 근 1년째다. 별거 아닌데 빨리 바꾸게 해드릴걸 싶다가도 별거 아닌 거 같은 오른쪽으로 돌려서 열던 열쇠가 그리울 때가 있다.
얼마 전에 이 시골동네에 도시가스가 들어와서 집에 도시가스 배관 설치 및 보일러 설치를 했다. 등유 때던 집에 도시가스가 들어오니 격세지감을 느꼈다. 이번 추석에 6 식구 요리를 하다 보니 가스레인지 자동 잠김 타이머를 설치되어 있었고 타이머가 20분으로 맞춰져 있어서 요란하고 부산하게 꺼지고 난 다시 켜 요리해야해 우수꽝스럽긴 했다. 하지만 타이머에서 아빠가 엄마에게 보내는 사랑을 느껴졌다.
아빠차는 전기차 거의 1세대 급인데 집에서 충전 가능한 집밥 충전소도 보유하고 있다. 물론 아빠가 어디서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내가 여기저기 전화해서 심사받고 공사 날자 잡고 고생한 것이다. [깨알 내 자랑이다] 아빠는 전기차에 집밥 충전소를 뿌듯하게 여기시는데 특히 심야전기 충전이 가성비가 좋기 때문이다. 다만 집밥 충전소에 충전기를 꽂고 빼는 것이 수동이다 보니 새벽에 동물 먹이 주는 것처럼 차에 먹이 주러 나갔다가 들어왔다 하신다. 전기차를 확인하거나 돌보거나 충전하는 모습이 예전 축사 있을 쩍 동물 보던 아빠 모습이랑 제일 닮아 보여 좋다.
추석에 어김없이 친정집에 다녀왔고 추석을 보내며 여기저기를 눈에 담아왔다. 올해 추석엔 달을 못 봐서 조금 아쉬웠지만 달님 늘 뜨는 방향으로 소원을 빌었다. 내게 보이지 않을 뿐 달님은 그 방향에 날 보고 웃고 있을 테니까.
한가위 소원은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그저 건강이다. 건강하자. 나도 나의 주변도 그 주변도 아프지 말고 건강하자. 아프면 고쳐가자. 고치며 살고 아프지 말자.
이 집에 계속해서 소환권 추억권 그리고 언제라도 쉬고 올 수 있는 휴식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까방권까지 늘 비빌언덕으로 있도록... 엄마빠 만수무강하소서..
2024 한가위 달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