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실에서 일할 때 나는 서른이었다.
남편은 경력단절이 된 나를 보며 이전에 다녔던 병원에 계속 다녔어야 했다고 말했다.
나도 안다. 계속 다녔으면 좋았겠지.
그렇지만 뭔가 그 당시 직장은 내가 살던 동네가 아니었고 출퇴근 왕복 2시간이 걸렸다.
차로 가면 왕복 60분 ~ 80분 정도 걸린다.
더군다나 3교대..
당시 나는 4년차였고 한참 알콜 환자들(소화기 내과 병동이었다)에 치이고 질렸던 상태였다.
밤마다 섬망 증상과 술취해서 병동을 배회하는 환자들 속에 있다보니 여기가 알콜 병원인지
소화기내과 병동인지 헷갈릴 정도?!
그러다 낙상하면 어디 다치고 엑스레이 찍어야 하고 보고서를 올려야 하는 그 일상에 지쳐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너리즘이었던 것 같다.
그 때도 역시 나는 간호사 일 외에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때였고
마침 결혼이라는 좋은 기회를 통해 그만두고 만다.
모아둔 돈도 있었고, 특별히 결혼 준비를 한 건 아니었지만 몽골 선교 시즌이었다.
오프를 계속 내는 것도 눈치보이고 신혼여행이라도 갔다오게 되면 또 오프를 내야하니까.
이래저래 병원에 정이 떨어진 나는 그렇게 퇴직금을 챙겨서 튀었다(?)
© jannerboy62, 출처 Unsplash
그러던 중 첫째를 낳고 키우며 1년 동안 쉬게 되었는데
주사실에 입사하기 직전 독서법 책을 출간했다.
물론 나는 책쓰고 책읽는 생활을 더 좋아했지만 이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남편의 급여만으로는 빠듯하기에 나도 나가야할 시기가 되어 외래는 편하겠지? 라며
굳이 많은 생각 안하고 지원했다.
내가 외래를 지원했던 이유는 8시 출근 5시 퇴근으로 아이의 어린이집 보육시간과 비슷하다는 점
이 점이 제일 컸다. 그래도 대학병원이니까 이력서에 뭐 한 줄이라도 넣을 수 있겠다 싶었던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일은 생각보다 많이 빡셌다.
주사놓는 로봇이 된 느낌이랄까.
병동 베이스에서 할 일을 주사실로 우겨넣은 것 같은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다.
주사실은 만능이었다. 심지어 퇴근해서 옷 갈아입고 있는데 주사실이 문을 닫아서 주사를 못 맞고 간다면서 UM(unit manager)에게 전화가 오기도 했다.
당연 우리는 퇴근시간 5시가 넘어서 문을 닫은 거였는데,
퇴근 시간도 보장 못 받고 이렇게 전화로 불려와서 환자 주사를 놔주는 게 맞나 싶었다.
(응급실 가면 되니까)
이런 일이 가끔 있었고, 퇴근하려고 준비하면 타과 외래에서 전화가 온다.
환자 1명만 간다면서 우리의 퇴근길 발목을 붙잡았다.
이런 일 포함, 잡다 자질구레한 일을 주사실로 넘기는 것들이 있어서
(그 일이란 진정 치료실 관리, 외래 이동카 관리 등등, 소아 성조숙증 검사 등등,
늦게 오는 아이들이 있어서 5시 땡하고 퇴근 할 수 없었다. )
© priscilladupreez, 출처 Unsplash
1년 만에 복귀한 병원에서 다시 일하면서 현타를 느꼈다. 아 내가 좋아하는 일은 정작 따로 있는데
이것저것 조금씩 할 줄 알아서 오히려 선택하기 어려운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전업작가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은 아니라 애매했다.
나와 같이 들어왔던 L 선생님도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자녀가 2명이었고, 아이들을 케어하기 위해서 외래에 입사했다고 했다.
알고보니 안과 외래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병동 정규직으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교대 근무를 하면 시어머니와 다른 가족들이 아이들을 케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워킹맘으로 많이 공감했던 부분이었다.
또 이제 30대인데 20대 선생님들과 잘 융화되어 일할 수 있을 지도 미지수.
그러려면 일을 잘해야 했는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의구심 등등
내가 간호사의 길을 가야하는가. 아니면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작가, 1인 기업의 길로 가야하냐 했을 때
L선생님은 정규직 병동이냐 아니면 지금처럼 외래 계약직으로 다녀야 하는지 고민했었다.
파트장 선생님도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고 우리의 고민을 이해했다.
선생님 곧 근속 30년을 바라보고 계신 임상의 찐... 노른자셨다.
우리가 지나온 길을 이미 거쳐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더 잘 아셨다.
나에게는 아직 밥벌이할 정도로 뚜렷한 수입은 아니니 병원을 다니라고 하셨다.
L선생님에게는 결정을 미루는 게 더 애매해진다며 더 나이들기 전에 정규직 지원에 대해 결정하라는
뼈 때리는 조언을 해주셨다. 그치만 선생님 자체가 워낙 상냥하고 온화하셔서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다.
병원 근처나 시내 근처의 맛집을 찾아 돌아다니며 그렇게 우리 진로 상담소는 계속 됐다.
회식 때마다 나오는 아이들 이야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는 단골 메뉴였다.
© acharki95, 출처 Unsplash
주로 회식하면 선생님이 밥을 많이 사주셨는데 우리는 선생님의 노후가 심히 걱정스러웠다.
선생님은 당시 대학 안들어간 아이들이 있었고 그 말은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많을텐데
우리한테 이렇게 쓰셔도 되나? 싶은 그런 거 말이다.
물론 우리가 비싼 오마카세를 먹는다거나 엄청 많이 먹지는 않았다.
2차는 우리가 내기도 하고 커피 정도는 우리가 샀다.
자꾸 계산하려 하셔서 말리고 선생님은 그러면 내가 비싼 거 낼게 하며 신나게 카드를 내미셨다.
그렇게 주사실 진로 상담소를 몇 십 회 이상 쫒아다니다 보니 1년 뒤 직장검진에서 체중이 5kg 정도 늘었다.
그래도 그 때 참 힘들었지만 선생님 덕분에 재밌었지 생각하며 추억을 꺼냈다 이내 닫아본다.
선생님이 경력만큼이나 타과 부서들 사람도 많이 헬퍼를 왔고 아는 분도 많아서
우리의 회식에 끼는 무리들도 생겼으며, 저절로 그렇게 외래에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다.
업무 강도면에서나 칼퇴 보전이 안된다는 점에서 주사실 근무 자체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2년 동안 일하면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라 너무 행복했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렇게 일할 수 있을까?
본능적으로 그럴 수 없다는 걸 그 순간 알아채버렸다.
© dariamamont,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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