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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의미 Aug 23. 2023

개인 간병과 공동 간병을 고민하는 보호자에게

3월 어느 날, 아빠를 간병해주던 둘째 고모의 남편, 나에게는 둘째 고모부 되시는 분이

가족 식사 도중 저혈당이 와서 쓰러졌다고 했다. 

아빠는 그 당시만 해도 지속적인 복시, 구토로 어지러움을 호소하던 때였다.

공동 간병 자리가 난들 당장 공동 간병에 있을 수 없는 손이 많이 가는 환자였다.






나는 고모부의 건강이 걱정이 되면서도 첫번째로 그럼 우리 아빠는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1차적으로 먼저 들었다. 이 소식이 친척들에게 전해진 모양이다.

막내 고모에게 전화가 왔다. 둘째 고모가 아빠를 봐줄 수 없으니 셋째 고모부가 7일 정도 아빠를

봐주시겠다고 했다. 더군다나 그 당시 엄마집도 입주, 우리 집도 입주를 앞두고 있었다.






막내 고모는 입주하려면 신경써야 할 게 많다며 그 기간 동안만이라도 

고모들이 아빠를 돌봐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염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남동생과 엄마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의견을 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개인간병을 구하자고 했다.






그러나 동생은 이왕 염치 없는 거 고모부도 해주신다고 하니 이번에는 도움을 받자고 했다.

내가 걱정하는 부분은 지속적인 케어가 가능하냐의 부분이라 고모부가 해주신다고 하더라도

1주일 동안 간병하고 가시면 그 이후는 누가 아빠를 케어하냐의 부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 와중에 둘째 고모는 고모부를 돌보다가 괜찮아지면 다시 아빠를 간병해주신다고 했다.

이 부분이 매우 불편했다. 친척들에게 폐 끼치는 것 같고, 우리(엄마, 동생, 나)도 못하는 일을

아빠보다 나이가 5살 ~ 10살이상 많은 고모들에게 맡긴다는 것이...










내 생각은 그랬지만 엄마와 동생이 이번에만 부탁하고 다음번에는 부탁하지 않을거라는 말에

일단 막내 고모에게 어렵사리 우리 가족의 의견을 전달했다. (이번 아빠가 아팠을 때 가족간의 소통을 조율해주신 분이 막내 고모다.) 고모는 알겠다고 하며 고모들, 고모부의 기차편까지 끊어주셨다.

(자신은 65세 이상이라 경로 우대 할인이 된다면서 말이다. )






그렇게 셋째 고모부(아빠에게는 셋째 매형)가 올라오셔서 1주일 정도 아빠를 봐주셨고

다시 둘째 고모가 올라오셨다. 나는 매우 불편했다. 둘째 고모부가 또 언제 다시 아플지 몰라서.

그리고 고모의 자식들이 어떻게 생각할 지 몰라서 고모가 아빠를 봐주는 게 감사하면서도 불편했다.

고모는 아빠를 아들처럼 생각하는 책임감이 있었다.(정말 못말려...)









© nate_dumlao, 출처 Unsplash








그렇게 3월이 지나가고 4월이 되었을 무렵, 둘째 고모는 퇴원 후 아빠를 데리고 광주에 갈 생각이라고 했다.

지금은 조금 어렵겠지만 몸이 조금 좋아지면(그게 대체 언제?) 고모가 생각하는 몸이 좋아지는 시기란

코줄(L-tube)을 제거하기만 하면 밥을 먹을 수 있으니 둘째, 셋째 고모가 밥도 챙겨주고

집에서 걷기 운동도 시켜준다고 했다. 






병원도 데리고 가신다면서 고모의 플랜을 나에게 펼쳐 보이셨다. 그러나 내 관점은 조금 달랐다.




첫째, 코줄 제거한다고 바로 식사할 수 있는 것 아니고 점진적으로 식이 단계가 올라가서 바로 밥을 먹을 수 는 없다.

 

둘째, 아직 아급성기 단계라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대학병원이 포진해 있는 우리 지역에 있는 것이 좋다.



셋째, 집에서 재활하는 것과 재활병원에서 재활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넷째, 고모들에게 아빠 케어를 맡길 만한 상태도 아니고 염치 없어서 안된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고모부가 또 실신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에게는 사촌 오빠였던 고모의 큰 아들이 발견한 모양이었다. 저혈당이 온 것 같다고 했다.

고모가 없으니 식사도 잘 안드시고 다리도 아프고 그런 복합적인 이유로 저혈당이 온 것 같다고 했다.

둘째 고모 피셜로는 내가 안 오니까 쇼하는 것도 같다고 말씀하기도 했다.






이 소식에 마음이 몹시 불편해졌다. 이제는 정말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생에게 나의 생각은 이런데 너의 생각은 어떠니? 라고 넌지시 물었다.

지금 아빠 상태가 3월에 비해서는 호전되었으니 공동 간병(1대1 간병이 아닌 1:6 간병)

으로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동생도 간병비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픈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공동 간병으로 가야할 것 같다고 했다.  

아마 내가 나서지 않으면 고모는 아빠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는 생각에 절대 먼저 당신 동생을

떠날 분이 아니었다. 그러면 우리는 고모 자식들에게 원망을 듣게 되겠지.






그러다 혹시라도 고모부가 또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천하의 나쁜놈이 되는 건 우리 가족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래저래해서 공동 간병이 되는 병원을 알아보겠다며 고모에게 이런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내일 병원에 전화해서 공동 간병이 되는 병원이 있는 지 알아보고 알려드린다고 했다.







© aaronburden, 출처 Unsplash







다음날 아침, 일하는 동안 틈틈히 아빠의 병원을 알아보았다.

전원 서류로 어떤 것이 필요한지 점검하고, PCR 검사를 못했는데 신속항원키트(자가 키트)로

대체 가능한지 물었다. (요즘 코로나라 이게 가장 중요)





병원 입원 상담실에 전화해서 내가 궁금한 것을 A-Z까지 모두 질문.

(아마 각 병원에서 나는 JS 리스트에 올랐을 듯하다)

만약 입원한다면 언제 갈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오픈 병원이라 오늘이라도 당장 입원이 가능하다 했다.





그래서 아빠의 전원 소식을 고모와 아빠가 입원해 있는 간호사실에 알렸다.

전원 서류로 어떤 게 필요한 지 몇시에 퇴원할 건지 이야기했다. 

전 날까지 아무말 없던터라 간호사실에서는 약간 당황해했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는 시간까지 준비해주겠다고 했다.









아빠를 생각하면 공동 간병에 가는 게 걱정도 되고 안쓰러웠지만

언제까지 고모들에게 신세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투병생활이라는 긴 게임에 이제 친척들은 퇴장해야 할 때였다.






아빠 개인적으로도 이제는 디딜 언덕이 없으니 예전에는 고모가 다 챙겨줬더라면

혼자 독립생활을 하는 것도 연습해야 했다.






이미 결정한만큼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수밖에 없었다.






 

© dariamamont,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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