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거, 저거, 저거.......
“아, 이상하네, 안경이 어딨지?”
한참을 이곳저곳을 찾다가 포기하고 얼굴에 로션을 바르려고 거울을 보니 내 얼굴에 떡하니 걸쳐져 있다.
하-아! 한숨이 나오고, 폰을 들고 폰을 찾는 나를 발견한다. 냉장고 문을 열고 뭘 가지러 왔는지 생각나지 않아 다시 싱크 앞으로 가는 일은 다반사다. 그래서 요즘은 계속 입속으로 되뇌려 애를 쓴다.
“마늘, 마늘,,,, 고추, 고추.... ,”
예전에 ‘가족 오락관’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명사로 지칭되는 ‘단어 맞추기 게임’이 있었다. 그림에 단어를 제시하면 각 팀에서 포즈나 수식을 통해 정답을 맞히는 게임이었다.
요즘 내가 하는 것이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지인들과 커피 마시는 대화에도 전달하려는 단어를 찾느라고 어, 그거, 저거... 하다가 이야기의 흐름은 끊기고 길을 잃어 결국 ‘아무 말 대잔치’가 되어버리곤 한다. 나도 치매검사를 해봐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치매연구’ 보고에 따르면 '깜빡증' 같은 증상이 7-8년 후에는 치매가 된다고 한다. 치매는 암보다 무섭다며
모두가 두려워하는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치매환자는 65세 이상의 고령자에게서 5년마다 두 배 이상의 치매환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연령도 젊어지고 있다는 연구다. 나도 곧 그 나이가 다가온다는 게 현실로 느껴지고 있으니 남의 일이 아니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 대한민국 치매 보고서에 따르면 뇌양성종양, 갑상선이상, 간 기능이상 등 원인치료를 하면 치료 가능한 치매는 약 15 %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85%의 치매는 조기발견으로 서서히 진행되도록 할 뿐이라는 말은 우리를 절망하게 만든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도 치매연구가 활발하다고는 하나 뚜렷한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화성에도 가는 세상이라는데, 인체의 신비하고 오묘한 비밀의 열쇠를 푸는 것은 인류에게는 아직 요원한 문제인가 보다.
치매를 유발하는 원인은 먼저 나이, 난청, 우울증, 사회적 고립, 뇌 내상. 외상, 과음, 고혈압, 당뇨, 정신적인 스트레스 등 90여 가지가 넘는 질환이 관련 있다고 한다. 증상으로는 기억력장애와 인지기능장애로 이유 없이 배회하거나 망상장애나 의심이 심해지고, 언어 및 신체적인 공격성이 증가하거나 환청이나 환시에 시달린다. 치매는 무감각, 무감동뿐만 아니라 치매 종류에 따른 다양한 특징이 있다.
‘생로병사’에서는 우리가 부러워할만한 복지국가 덴마크의 작은 치매도시를 소개하고 있었다. 거기서는 치매환자들이 전혀 불편을 느낄 수 없도록 의료진, 자원봉사자 등 인력들이 환자중심의 치료를 하고 있었다. 굳이 구분 짓지 않으면 누가 치매환자인지 모를 정도로 자유롭고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는 곳이었다.
여느 소도시의 마을처럼 헬스장, 상점, 미용실, 레스토랑 등 언제든 갈 수 있고 함께 모여 노래하거나 쇼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치매환자라고 차별받지 않고 다양한 운동, 식생활, 취미 등 균형 잡힌 생활을 보면서 많이 부러웠다.
또한 치매예방으로 은퇴한 어른들은 노인공동생활주택에서 생활하며 식생활, 건강, 운동과 취미생활을 함께 하였다, 공유공간으로 사회적 고립감을 감소시키고 개인공간으로 사생활 보호까지 받으며 여유로운 삶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현실적 괴리감이 느껴졌다. 많은 어르신을 대상으로 하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같은 기관에서는 기본적인 케어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치매환자를 위한 세심한 배려로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치매’라고 하지 않고 ‘노망’(老妄 - 늙으니 허망하다. 망령되다 뜻 )이라고 하였다. 늙으니 자연스레 잊음이 잦다는 뜻이니 온 가족은 노망 난 어른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냥 그렇게 살았다.
노망이 심해지면 벽에 *칠하고 밥숟갈 놓고 다시 밥 달라 하는 이야기는 지금도 존재한다. 그런 일이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면 나이가 많아지면 통과의례처럼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어른들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눈멀고, 귀 멀고, 냄새 못 맡는 등 감각이 떨어지고 모든 것에 초연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한 지인(치과의사의 말을 빌어)은 치근조직이 만 42세 이상이면 쓸 수 없으며 옛날로 치면 죽은 목숨이라는 거다. 또 평균 연령이 낮은 곳에서는 치매가 없다고도 했다. 그러면 치매라는 것은 길어진 생명에게 주는 '필요악'인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밥을 먹은 일, 방금 했던 일, 누구라고 한 것을 잊고 되묻는 일 등....
조금 전의 기억은 없어지고 아주 먼 오래된 기억으로 살아간다. 그 오랜 기억마저 퇴색되고 흐려지는 어느 날 모든 걸 내려놓는다는 생각도 없이 떠나가는 삶. 기억 한 줌도 지니지 못하고 가벼운 깃털처럼 혹은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져 가는 삶을 ‘병’이라고 하지 않았다. 삶의 비밀을 아는 것처럼 가야 할 때를 알고 가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할머니의 기억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동화가 떠오른다. 저자 멤 폭스는 호주 사람으로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 ‘윌프리드 고든 맥도널드 파트리지’를 추억하며 쓴 글이다.
‘윌프리드 고든 맥도널드 파트리지’라는 긴 이름의 어린 소년이 살았다.
소년의 옆집에는 양로원이 있었고, 그곳의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잘 알고 있었으며 게임도 하고 심부름도 하며 친구처럼 지냈다.
그중에서도 자신처럼 긴 이름을 가진 낸시 앨리슨 델라코트 쿠퍼 할머니를 가장 좋아했다.
어느 날 낸시 할머니가 기억을 잃어 안타깝다는 부모님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기억은 머릿속에 간직해 두었다가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거”라고 아빠가 말했다.
소년은 기억이 무엇인지 더 알고 싶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을 찾아가서 물었다.
“그건 따뜻한 거란다, 아가야, 아주 따뜻한 것.”
“그건 아주 오래된 것이란다. 얘야, 아주 오래된 것.”
“그건 너를 울게 만드는 거란다. 꼬마야, 울게 만드는 것. “
“그건 너를 웃게 만드는 거란다. 사랑스러운 아이야. 웃게 만드는 것.”`
마지막으로 존경하는 할아버지에게 물었어.
“기억이 뭐예요?”
“그건 황금처럼 소중한 거지, 젊은 친구, 아주 소중한 것.”
어린 소년은 낸시 할머니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끼던 소라, 조개껍데기, 꼭두각시 인형, 할아버지 생각이 날 때마다 슬퍼지는 메달, 황금처럼 소중히 여기는 축구공, 닭장에 들러 신선한 달걀도 바구니에 담아 낸시 할머니에게 보여주었다.
낸시 할머니는 소년이 가져온 아름다운 물건을 보자 머릿속에서는 어떤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올렸다.
따뜻한 달걀을 쥐었을 때는 이모네 뜰에 있던 새둥지의 푸른 점이 박힌 자그마한 새알을 만지던 일,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대고는 어렸을 적 기차를 타고 바닷가에 갔던 일, 신고 있던 긴 강화가 얼마나 더웠는지를....
메달을 만질 때는 큰오빠가 전쟁터에 나간 후 돌아오지 못한 슬픈 이야기를 했고 꼭두각시 인형을 갖고 놀면서 동생이 까르르 웃던 것까지 기억해 냈다. 그리고 소년에게 축구공을 던져주면서 서로 처음 만난 날과 비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며 소년과 할머니는 웃고 또 웃었다.
어린 소년의 해맑은 사랑으로 할머니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데 성공한다 로 끝을 맺어서 안심되고 기뻤다.
과연 이런 이야기가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림동화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따뜻해지고 가슴은 뭉클해졌다.
온몸으로 삶을 살아낸 이들이 ‘치매’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삶을 이어가고 있다. 힘든 시절을 잊고 싶은 건지 자신도, 자식도 잊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 돌아가는 것은 순리일 수도 있다.
치매를 예방하는 많은 방법을 제시하지만 아직은 해결책이 없다는 의사들의 소견을 보았다. 그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요즘 세상에 너무 구태하고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도 엄마나 혹은 누가 되었든 그런 일이 오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과 미소만을 간직하고 너무 슬픔에 젖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에게도 그렇게 해주기를 미리 말해두고 싶다.
‘할머니의 기억’처럼 어딘가에 숨었다가 따뜻한 마음을 만나면 꽃망울이 살며시 펴지는 것처럼 어떤 이의 기억도 그렇게 되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동화 같은 마법도 기대해 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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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책방에서 by 해인